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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소한의 권위가 있는 사회

이창수( icomn@icomn.net) 2019.08.15 01:31

사회가 ‘잘’ 작동되려면 권위가 필요하다. 권위는 통솔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힘과 통하는 말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이 정치를 “희소 자원의 권위적인 배분‘이라고 할 때나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인 권위나 합리성에 기댄 권위를 말할 때, 권위는 단순히 이끌거나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정당성은 시대 정신을 반영한다. 막스 베버가 말한 권위는 일종의 지배(자)나 질서‘의’ 권위이거나 지배(자)나 질서를 ‘위한’ 권위이다. 이런 권위는 기존의 권위에 기대어 순응하는 태도가 권위주의를 낳게 되고 실재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합리성의 원리로 작동된 적은 없다. 지식인도 그렇고 국회, 정부, 법원, 검찰, 경찰 등 공식적인 권력기관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누가 무엇을 위해 통솔(국가권력의 행사)하는가의 잣대로 보면 민주주의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공식 국가기관들이 권위를 갖고 있는가?

 

국회의 권위는 없다고 봐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왜 매번 선거를 하는데 권위를 갖는 인물로 교체되지 않을까? 선거제와 선거행위가 보편적인 시대 정신을 기준으로 정치인을 선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선거구제도도 그렇지만 정당 공천자에 유리한 선거제도 그리고 목전의 이익을 중심으로 선거하는 국민들의 행태가 ‘유권자’라는 틀을 개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편이면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가족주의적, 연고주의적 정당’제도가 ‘공당’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도 한 이유이다.

 

법원과 검찰, 경찰과 국정원 개혁은 늘 정치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 기관들이 더이상 권위가 없고 존재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상황의 방증이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슈가 됐지만, 개혁된 적은 없다. 개혁안은 지식인이나 정치인과 그 집단이 제안한 정책과 토론에만 국한되어 논의된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개혁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관 심판 기능의 독립성을 스스로 무너트린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으며, 사법 관료들을 국민이 직접 통제할 방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국민은 사법과 권력 기관을 불신하고 있지만, 개혁은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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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마이뉴스 제공)

최근 한일 간에 소위 ‘경제전쟁’이 진행 중이다. 우리 법원의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과 그 집행에 대한 일본 아베 내각의 수출 규제 조치로 대응하면서 ‘과거 청산’ 특히 피해자 문제가 국가 간의 교역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정치권에서는 매국 논쟁과 관제민족주의로 논란이고 시민들의 일본 제품 보이콧이라는 소비자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법원의 결정은 대한민국 안에서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는 점도 봐야 한다. 법률가들에 의한 과거 청산 방식은 늘 ‘법적 논쟁’ 즉 법적 합리성으로 해결되는데 이 역시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 보자.

 

나는 정치적인 권위와 (사)법적인 권위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부재하거나 약하다고 주장했다. 행정 권력의 권위는 과연 존재할까?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행정권력의 권위는 그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이익 공동체에 충실한 것이었다. 즉 집합적인 권위는 원래 없고 집행력으로 이익을 나누는 그 집단내에서만 형성된 일종의 악의 카르텔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도, 박근혜도, 문재인도 모두 국민이 선출했다. 국민이 자기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오용해 버려 주권자의 권위도 위태롭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직후 검찰 표적수사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행정권력은 그 지지자들에 의한 부분적인 권위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권위는 실체 없는 실체에서만 형성된다. 권위는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권위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전제적인 요소일 뿐이다. 권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문제와 한국 사회에서 권위란 무엇인가에 답해야 권위 있는 사회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는 “누가 누구를 위해서”의 문제이고 “그 무엇”은 권위의 내용이다.

 

즉 국가나 지배(자)가 질서를 위해서 권위를 형성하던 시대와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시민인 내가 인권과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권위’를 형성시키자는 것이다. 일본산 불매 운동이나 일본 여행 자제와 같은 것이 한국과 일본, 식민지배와 청산이라는 도식을 넘어 인권을 유린한 과거와 그 피해자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하는 국내외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시민이 인권을 위한 일이다. 현대의 권위는 국가나 지배자의 권위가 아니라 시민이 행하는 권위이고 그 내용은 인권과 평화로운 삶이다. 애국주의 운동이 아니라 인권운동으로 시민적인 권위를 설정하고 삶의 실천 윤리로 삼는다면 이것이 곧 개혁의 기준이자 내용이 되고 공적 권위를 다시 세우는 방식이다.

 

4·3 사건이나 한국 전쟁 전후의 국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 그리고 납북 어부 조작 간첩 사건이나 아동 인권 유린 사건인 선감학원과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등의 피해자 문제,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저지른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를 똑같이 해결하는 말해야 한다. 이런 역사적인 국가 잘못을 해결하는 문제와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문제와 일제 강제 동원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 또는 개인들의 전범 기업에 대한 사법적인 피해 구제는 동일한 인권 문제이다. 나는 시민에 의한 인권 보장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보편적인 사회적인 기준을 ‘최소한의 권위’라고 한다. 특정 집단이 복종하는 특수 이익 보장과 국가별로 다른 특수한 그 무엇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삼성 해고 노동자 김용희 씨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잘된 정부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국회의원도, 행정당국자도, 대통령도, 법관도 모두 이 최소주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시민의 최소한의 권위는 ‘똑바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눈’이 아니다. 이것은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의 삶에 의지하고 돌보는 ‘그물’이다. 권위는 부분만 복종하여 최대한의 이익보장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 내용에서만 현실적이 된다.

 

인권 보장과 평화로운 삶을 지속하자는 것이 통솔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당한 힘 즉 ‘최소한의 권위’가 되는 사회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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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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