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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여행의 본질

김정환( icomn@icomn.net) 2019.10.22 18:26

1. 이번 겨울에는 오랜 시간 그리고 혼자서 멀리 어딘가를 다녀오려 한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는 것이 삶의 본질. 인위적으로 나의 시간과 공간에 낯섦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2. 명준에게

 

명준이가 이 글을 읽을 때 즈음은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흐른 후겠지. 삼촌은 지금 이집트 여행중이야. 이 곳의 아가들을 볼 때마다 삼촌은 명준이 생각이 나는구나. 앞으로 명준이도 많은 여행을 하겠지만 여행은 ‘낯선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기’더라.

 

명준이에게 주어질 시간과 공간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을거야. 일상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명준이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성취하고 아파하고 패배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모든 의미를 담은 무거운 말이란다. 삼촌은 명준이에게 익숙함으로 느껴질 일상이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야. 하지만 명준이에게도 분명 일상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겠지...

 

누군가 인생은 여행이라고 했다는데... 그 말은 그런 의미 아닐까? 일상 속에서의 낯섦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웃으며 긍정적으로 편안하게 안고가야 한다는... 삼촌은 여행을 하면서 "여행자"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구나. 명준이에게 인생이라는 여행은 어떻게 다가올까? 아마 명준이는 그 여행을 즐기는 그런 담대하고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겠지?

 

짧은 여행이었지만 명준이 생각을 많이 했단다. 한국가면 다시 한번 번쩍 안아주고 싶구나. 이집트에서 명준이에게 첫 엽서를 쓰며 삼촌은 명준이와의 만남에 다시 한 번 감사해 한단다.

 

2013.1.20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외삼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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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마이뉴스)

 

3. 아직 아가였던 조카에게 엽서를 쓰면서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이집트 여행이었다. 사막을 걸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생각해 보고, 늦은 나이지만 로스쿨에 꼭 도전하여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그런 소중한 여행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결정적인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우유부단했고 눈치 살폈고 미루었다. 진학에 있어서 그러했고 가족을 꾸리는데 그러했으며 직업을 가지는데 그러했다. 학교와 전공은 갑자기 바뀌었고 결혼생활은 실패하였으며 직업은 비정규직을 전전하여 단 한번도 정규직 생활을 해본 일 없던 터다. 나에게 숨통이 된 것은 여행이었고 많은 결정은 여행의 순간에 이루어졌었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어 길을 걷다보면 머리에 많은 고민들이 정리되는 느낌도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은 가진 것이 아니라 쥐고 놓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여행의 순간이 제격이다.

 

4.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이 있다. 세가지 질문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답을 얻는다. 내가 그 답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여행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여행을 간 그 곳의 어떤 풍경도 특별할리 없는 것들이다. 사진으로 보면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그 풍경들. 그 풍경을 걸으면서 이 낯선 곳이 나의 일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봤었다. 이 풍경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매일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 아닐까.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이 곳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인간관계도 그런 것 아닐까. 그런 생각들. 내 일상의 공간을 걸으며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었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 매일 볼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고 보면 오늘만이 나에게 주어진 전부이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인연 이상의 것을 탐할 수 없다. 낯선 곳을 걸으며 나는 나의 일상이 정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지금이 중요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것이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에 나오는 답이기도 했다.

 

5. 여행을 할 때 여행에 대한 마음이 가장 짙어지는 곳은 공항이더라. 공항을 갈 때의 기분과 돌아올 때의 기분에 여행의 많은 것이 담겨있다. 그 곳에서의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공항은 그런 곳이다. 만남과 이별을, 설렘과 아쉬움을, 시작과 끝을, 떠남과 돌아옴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사람들의 무표정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 관계와 시간이라는 삶의 본질이 가까이 느껴지는 곳. '먼 곳'에 대한 각자의 마음 하나하나가 짙어지는 곳.

 

6. 이번 겨울에는 오랜 시간 그리고 혼자서 멀리 어딘가를 다녀오려 한다. 그 공항에서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나는 무엇을 결정하고 또 무엇을 내려놓고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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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법학박사,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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