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작정하고 말하기

토요일의 참소리

김수연( icomn@icomn.net) 2020.01.04 13:25

연말이 되면 사람 만나는 자리가 자연스레 생긴다.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내게도 송년회다, 신년회다 하는 부름이 온다. 일대일의 만남의 자리에선 말을 곧잘 하는 편이지만 사람 수가 넷만 넘어가면 말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주로 고개 끄덕이며 듣기 바쁘다. 직업이 작가라서 그럴까.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말이 고맙고 재미있다. 내 이야기는 내가 너무 잘 알아서 뻔하니까 재미없다. 얼마 전에 있었던 동네 카페 송년회에서도 난 거의 말을 안 했다. 갱년기에 접어든 동네 언니들의 세상 고민이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조용함’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나의 대화법은 ‘듣기’와 ‘고개 끄덕이기’다. ‘말하기’는 상대방이 질문을 할 때만 주로 쓴다. 여느 책에서들 말하는 ‘경청의 자세’의 표본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낀다. 재미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후련함은 느낀다. 한참 자기들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서야 내 상황을 궁금해한다. 뒤늦게 미안해하며 질문이 들어오면 그때 내 이야기를 짧게 말한다. 그리고 다시 상대방의 이야기 듣기 반복.

 

‘말하기’보다 ‘떠들기’?

몬스터가 되어버린 그들

 

그렇게 ‘조용’한 내가 작정하고 말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강의시간이 그렇다. 세 시간을 꽉 차게 떠들어도 시간이 늘 아쉽다. 또 어떤 때 청산유수로 말이 나오느냐 하면 억울하고 분할 때다. 화가 나면 상대방 말할 사이도 없이 끝장나게 질리도록 떠들어줄 수 있다. 그 방법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 아껴두고 사는 편이지만.

 

TV를 틀면 말을 쏟아내기 바쁜 정치인들을 본다. 예전에는 저런 얼굴들이 분명 아니었을 텐데 죄다 얼굴들이 찌그러져 있다. 과한 말 탓이다. 미간에 인상 팍팍, 분노에 차오른 면상들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짐한다. 좋은 표본이 아니라 나쁜 표본이다. 외면하고 싶은 얼굴들이다. 경청도 아까운 얼굴들이다.

 

말도 가려야 잘 사는 것처럼

귀도 가리고 아껴야 잘 산다

 

화가 차오른 얼굴색은 붉다. 며칠 전에도 화가 차오른 누군가의 얼굴을 봤다. 하고 싶은 말은 쏟아내며 사는 게 본인 정신건강에는 좋겠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말이 과한 시대다. 듣고 있기 참 피곤하고 정신이 없다. 주장에 논리와 염치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한쪽이 말이 늘면 어느 한쪽은 말이 줄어든다. 언제까지 요상한 말들을 작정하고 늘어놓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줘야 할까. 새해도 되었으니 다짐 하나 정도 해보자. 경청의 자세는 그럴만한 상대에게만 쓰기로. 아니다 싶으면 조용한 나도 작정하고 말해볼 테다. 아니면 그 자리를 조용히 벗어나거나.

---------------------------

김수연 : 작가

 

noname0111111.png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