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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대정치와 반쪽정치를 넘어서자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1.17 19:42

컬럼을 쓰기 위해 여러 주제를 생각해 봤다. 이른바 조국 사태, 검찰 개혁, 공수처 도입, 검경 수사구조 조정, 선거권 만18세 이상으로 확대, 외주 비정규직의 노동, 과거사법 개정, 삼성 노조,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재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장애인 비하 인식과 발언, 국가인권위원회 논란, 기후변화 협약, 집값 문제, 양승태 사법농당 재판, 일제 강제 동원, 미국의 방위비 분담과 파병 요구, 남북 관계, 청소년 고용, 노숙인 등 많은 문제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별 수 없이 정치 얘기를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보이고 나름 답이라고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 ‘정치’의 어느 지점을 파고 들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결정 장애가 있는 게 아니다. 많은 평자들이 민주당, 한국당, 정의당 등 기존 정당들의 시각을 반영한 평론이나 주장을 한다. 특히나 총선이 다가 오면서 이런 시각이 언론이나 공론의 주제로 정답처럼 회자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논의가 누리는 곳(기득권이 있는 집단)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 정치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의 어느 측면에서 무엇을 제기할 것인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의외로 쉽게 결정되었다. 반대와 반쪽의 정치가 일상화된 우리 정치의 그 원인이 기득권에서 시작되는 정치 담론이나 여론 형성 과정이라는 점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나름 논의꺼리를 제시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내가 글을 쓰려는 ‘정치’는 너무나 다양한 정의와 의미를 갖고 있어, 사람마다 다른 용어로 정치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 나는 정치를 ‘인권’, ‘법’ 특히 ‘헌법’, ‘법원’, ‘검찰’, ‘경찰’ ‘국회’, ‘지방자치체, ‘대통령’, ‘정부’, ‘시민사회’, ‘정당’, ‘문화’, ‘참여’, ‘학문’, ‘경제’, ‘노동’ ‘언론’, ‘소통’, ‘선거’, ‘복지’, ‘사회적 소수자’ 등의 관련된 모든 말들에 관통하는 ‘공식적인’ ‘합의 과정’ 또는 ‘합의된 결론’이라고 보고 쓰기로 했다. 한마디로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의 법제도에서 합의하는 과정과 결론을 정치라고 보았다. 물론 다른 정치도 있다. 정치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제도 정치를 말하려고 한다.

이 정치에서는 발언이나 권한 행사 등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시민, 관료, 법관, 검사, 변호사, 경찰, 경제인, 노동자 등 중에서 적극적으로 소리를 내거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위와 같은 ‘합의하는 과정에 참여해 합의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적어도 제도적인 정치라고 할 수 있다.

20대 국회 중후반의 정치, 즉 박근혜 탄핵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의 정치에 국회 정치는 의회주의에 기반한 제도권 정당들이 ‘당인’과 그 지지자만을 보며 하는 정치가 극에 달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붕당’ 정치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이런 정치가 가능한 것은 현행 제도가 상정하고 있는 선거를 통한 국민 통제라는 것이 결국은 ‘표’ 모집 행위라는 이벤트로 전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선 적극적인 지지자들을 확고하게 모으고, 그 뒤에서 표를 모으려는 기법 정치, 선거 공학 이벤트가 ‘표’를 모으는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고매한 행위라는 인식은 없다. 왜냐하면 선거에서는 불변하는 자당의 지지층이 유동층만큼이나 우세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지자만 보고 정치하는 근거가 된다. 즉 기존 거대 정당은 개혁을 하든, 개혁을 반대하든 지지자를 바라보고 하게 된다. 이 때 지지자는 ‘표’로 말할 정도의 유의미한 ‘집단’ 또는 사회적인 ‘범주’로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지식인이나 언론이 진단하는 새로운 의제 등이 가끔 변수가 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20대 국회에서는 지식인과 언론이 정치의 방향을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기존의 정치세력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입장을 말해왔다. 지지자를 확대 재생산하는 활동을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식인은 전 방위적으로 정치적인 현안에 개입한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의견이나 해답은 언제나 ‘정의’나 ‘개혁’이라는 관념화된 의도만 일치할 뿐 그 주장의 요지는 극단이고 대립적이다. 같은 현상과 사물을 보고도 전혀 다른 평가와 처방을 제시한다. 이런 현상은 이른바 조국 교수의 일가족 수사와 검찰 개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공통된 지반은 없고 완전히 다른 해법을 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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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마이뉴스)

우리 정치에서 합법 제도권 정당들이 지지자를 위한 정치를 하는 이유는 주권자의 의사 표시인 ‘표’를 모을 수 있다는 정치적인 문화도 한 몫 하는 게 사실이다. 거기에 그 정당들을 통해서 지식인, 법조인, 고위 관료 등이 현실정치나 그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신념, 즉 탕평인사가 아니라 오로지 자당의 가치라는 명분만을 이루려는, 통합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는 정치 행태가 고착화된 상황도 봐야 한다. 즉 변화가 필요 없는 상황에서 성장하고 독점할 수 있는 기득권 정치세력들이 항존하고 있는 것, 그것이 정치 위기의 본질이다. 기존 정당이 끌어당기는 정치적인 힘은 강하고, 시민들의 자율성은 약화된다. 나는 국민의 주권이 몇 표라는 종이의 양으로 가치가 절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자율성을 갖고 심의하고 숙고하고 다양하다면 선거는 ‘표’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 정치를 기득권 정치, 적어도 기존에 강하게 존재하는 정치세력들이 주도하는 정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붕당 정치다. 국민 주권의 가치가 가벼운 솜털 하나 처럼 취급되는 정치다. 국민의 대리자들만이 합의 과정과 그 결과를 독점하는 구조 말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반대로 반정립하려는 입장만이 존재한다.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부정하는 정치다.

예를 들어 보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도입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라고 전면 거부하고 국회의 논의 과정을 거부하다 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저지하지 못했다. 결국 자기 지지자들을 바라보는 정치, 기존의 검찰 적폐를 두둔하는 정치를 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황교안 당대표가 있다. 혹자는 그를 정치 초년생이라거나 원외에 있기 때문에 국회 입법 과정을 ‘거부’하는 단식, 장외 집회라는 반의회주의적인 행태를 취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기득권 거대 정당을 통해서 더 큰 권력을 잡기 위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자기’ 정치를 했다고 본다. 그는 검사 출신인데다가, 법무부 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그냥 기득권 질서에서 스펙돌려 막기 밖에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문(反文)’ 세력의 수장이 되려는 것 밖에 없다. 이 또한 기득권적인 사고이다. 기득권적인 사고는 곧 무엇을 하자는 ‘개혁’이라 아니라, ‘개혁’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도입은 새로운 개혁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검찰 개혁을 위해서 검찰 기관을 둘로 쪼갠 것이지 어떠한 혁신적인 내용도 없다. 다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검찰을 둘로 쪼개 관리하는 정도의 의미만을 갖고 있고 기본적으로 검찰의 기능이 분화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개혁의 핵심인 국민의 주권이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논의되었던, 시민이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기소배심’을 뺐기 때문에 국민은 여전히 검찰 개혁을 합의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냥 기존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권한 조정에 불과한 것이다. 민주당도 기존 거대 세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공수처 도입의 논거도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한 형사사법 체계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기존 검찰의 적폐에 ‘반대’하여 ‘견제’ 조직을 하나 창설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것도 (비록 개혁 대상인 검찰이라고 할 지라도) 검찰에 반대한 것이다. 사실 검찰 개혁은 적폐 검사들의 청산에 있어야 한다. 부정한 행동을 한 검사들이다. 이걸 못하면 검찰을 개혁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검찰 자체를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지방 검찰제도의 신설 등은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또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처럼 비리를 더 넓게 철저히 조사해서 범죄에 이른 고위 공직자들을 ‘필요적으로 (검찰이) 기소’하도록 하는 방안은 너무 쉽게 공직자 범죄에 대한 수사로 국한 되어 버렸다.

우리는 있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게 무슨 큰 개혁이거나 투쟁인 것처럼 과대포장하는 언론 속에서 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 인사들이 무한 반복적으로 확대시키는 언론과 이에 편승하는 지식인들의 튀는 개입과 이를 통해서 반쪽 정치가 일상화되는 구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개혁을 얘기해야 한다.

개혁은 새로운 것으로 하는 것이지 기존의 것에 대한 반대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통합을 얘기하는 정당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고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혁신’을 주장하는 세력은 그 인물이 ‘교체’되지 않고는 혁신할 수 없는 한계에 있다. 이미지, 감성적인 정치인 스펙이 있는 인사 영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통합과 외연의 확대를 위한 기득권 정당들의 기득권 정치이다. 이건 반쪽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반대 정치를 통해서 통합과 확대를 하겠다는 ‘자유한국당’이나, 한번 정치나 정부에 몸담으면 그 스펙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더불어민주당’의 돌려막기 인사처럼 ‘반쪽 정치’를 하는 것으로는 새로운 가치와 다양한 의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국민 소환제’, ‘국민 발안제’의 도입 없이 국회 정치가 민주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국민의 높은 윤리의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좁은 법원의 판단에 기대어 자신들의 기득권적 질서를 유지하는 상층 인사들을 교체하지 않고 사법 기득권 질서를 개혁했다고 말할 수 없다. 국민이 상식적으로 기소와 판결을 판단하는 제도 도입을 배제하고 어떻게 검찰과 법원을 개혁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020년 총선에서 반대와 반쪽의 정치를 넘어 서는 방법은 시민의 주권의 가치가 질적으로 평가되도록, 시민 스스로 있는 곳에서 인간이 존엄함을 생각하는 인권 실천뿐이다. 정치인도, 검사도, 법관도, 노숙인도, 장애인도, 시민의 한 사람이다.

 

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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