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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피의 연대기’를 위하여

고영남( icomn@icomn.net) 2020.03.03 11:44

마스크 정치학과 ‘생리대’의 정치학

지금 세상은 마스크 정치학이 지배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을 어떻게 막느냐가 아닌, 시민들이 마스크을 얻는 데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에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달린 형국이다. 민주주의의 수준 문제보다 인권의 문제가 더 크다는 말이다. 언론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코로나19’의 검사 건수가 증가하는 등 전염병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민의 성숙함은 빛을 발하지만, 이와 별개로 빠른 전염성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오늘은 마스크가 아닌 ‘생리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전혀 다른 듯하지만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여성을 해방시켜 주는가?’라는 카피로 시작하는 1971년의 첫 생리대 신문광고는 1980년에 이르렀을 때 불쾌하거나 더럽다는 이유 등으로 광고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가 1995년에야 풀려난 사회사의 기록을 안고 있다. 한 달에 약 5일을 기준으로 평생 흘리는 생리혈의 양이 10 리터에 이르는데, 생리대 구매 비용은 한 달에 1만 원 안팎이 소요된다. 생리대 가격을 인상한다는 소식이 주기적으로 들리는 가운데 경제적 이유로 신발 깔창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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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혈을 흘리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인터뷰를 통해 기록한 영화 <피의 연대기>(2018, 김보람 감독)는 생리혈을 관리하고자 하는 여성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누군가에는 단순히 성교육시간에 감상할 좋은 자료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어느 장면에라도 출연하여 내 생각을 밝히고 싶을 정도로 여성 고유의 정치성을 매우 짙게 드러낸 작품이다. 여성주의 필름의 걸작이라고 하는 <안토니아스 라인>(1995)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만의 호평일까? <피의 연대기>는 미국 뉴욕의 무상생리대 정책과 2016년 총선 후보의 해당 공약을 소개하면서 무상생리대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시작

‘코로나19’의 시대에 무상 마스크가 어울리듯이, 이제 여성차별의 증거가 아닌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생리혈에 관한 무상 위생물품이 필요한 시대에 이르렀다. 한국도 매년 10만 명의 저소득 여학생이 생리대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여성도 4명 중 1명은 ‘생리 빈곤’(Period Poverty)으로 인해 천이나 낡은 옷 등으로 생리대를 대신한 경험이 있다고 조사되었다. 며칠 전 보도된 스코틀랜드의 무상생리대 제공 법안 소식이 그렇다. 브렉시트에 이어 과연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통합될 것인지,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이뤄질 것인지 등이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으나 생명의 시대에 가장 이목을 끄는 사안은 생리대의 무상 공급법안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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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근 영국에서 실시 된 한 연구에 따르면 소녀의 15% 이상이 위생 제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으며 19%는 비용부담 때문에 덜 적합한 제품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https://www.femalista.com)

 

2017년 기준 542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스코틀랜드가 세계 최초로 공공장소에서 생리대 등을 모든 여성에게 무료로 제공한다고 밝혔다. 스코틀랜드 하원은 2월 25일 이런 내용의 생리용품 법안〔Period Products(Free Provision)(Scotland) Bill〕을 통과시켰다. 이번 1단계 투표에서 반대표는 단 한 표도 없었다고 한다. 이 법안이 약간의 절차를 거친 뒤 시행되면 지역 센터, 청소년 클럽, 약국과 같은 지정된 공공장소에서 생리대나 탐폰 등 생리용품이 무료로 배포된다. 생리용품 무상공급에는 매년 2,400만 파운드(약 3,300만 달러)의 예산이 들 것으로 추산되는데,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이미 2018년 9월부터 520만 파운드를 들여 학교와 대학 등에서 생리용품을 무상으로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들이 수정안을 제안할 수 있는 두 번째 단계로 진입했다. 물론 이 법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나 최종 통과를 하기 전에 검토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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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법안을 2017년 처음 발의한 모니카 레논(오른쪽)이 2월 25일 에딘버러 의회 근처 집회에서 법안 지지자들과 함께 한 모습. https://www.kbia.org/post)

 

그렇다고 해서 이런 주장이 한국 사람들에게 낯선 것은 결코 아니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8일부터 청소년수련관, 도서관, 복지관 등 청소년·여성이 이용하는 서울 시내 11개 공공기관에 비상용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해 시범사업을 해왔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용자는 대체로 만족했으며 우려됐던 남용 문제도 없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난 석 달 동안 11개 기관에서 사용된 생리대는 하루 평균 4개꼴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비상용 생리대 비치 기관을 올해 200곳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한다.

서울시의 이런 움직임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선례로 작용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가 작년 11월 상록도서관, 서구청소년수련관, 서구청 3개 기관 여성 화장실에 1대씩 총 3대의 비상용 생리대 무료 자판기를 설치했는데, 개관 시간에 여성 화장실을 이용하는 누구나 무료로 생리대를 이용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도 올 2월부터 구청과 청소년 문화의 집 2곳의 화장실에 생리대 자판기를 시범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선별복지 차원에서 접근했던 일부 지자체의 사례도 있으나, 대체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여성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도 곧 2020년 총선을 맞이하는데, 생리대를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공급하자는 공약이 넓게 퍼지기를 바란다.

 

여성 고유의 사회적 문제

 

가임여성의 합계출산율을 언급하면서 누구도 여성의 자궁에 대한 존엄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존엄은 생리혈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그 인식이 전혀 공공의 영역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생리혈이 여성차별의 증거로써 활용되었다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리혈에 대한 관리비용을 전적으로 해당 여성에게 맡긴다는 것은 결코 오늘의 사회에 맞지 않는다. 사회는 모든 여성이 필요한 생리대와 탐폰 등 보건위생물품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차별을 겪지 않도록 그 전달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모든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스코틀랜드 의회의 토론에서 언급된 것처럼 생리용품은 종종 여성의 문제로만 인식되지만, 결국 이는 틀렸다. 이는 여성에게 드러난 우리의 평등에 관한 문제이자 사회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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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 : 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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