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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입법 배심제를 도입하자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5.07 14:18

20대 국회는 21대 국회로 거듭 난다. 그 사이에 총선이 있었다. 총선 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주장과 해석이 있지만 20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 위에 서 있다. 여기서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의 세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리 헌정사에서 국회가 최악이라고 하지 않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20대 국회는 최악이었다는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정치개혁이나 검찰개혁, 법원개혁이나 ‘과거사법 개정’ 현안들을 이념의 문제로 간주해 상식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새로운 원내대표를 선출하고 있다. 다소 뉘앙스는 다르지만 후보들은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표시하고 있다. ‘일’하는 국회의 의미는 불확정 개념이고 추상적이어서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간파하기는 어렵지만, 국회의 기능 중 중요한 입법 기능을 충실히 심의해, 국민들로부터 ‘밥값’한다는 평가를 받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의원들 중심의 각오가 현실화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국민들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대 국회에서 입법하지 않은 법안들을 처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정쟁으로 처리하지 못한 ‘과거사법 개정’ 등을 처리하라는 요구는 상식적이다. 충분한 심의와 합의가 있는데도 정략적인 이유로 처리하지 못한 법안들을 폐기하고 새로 구성된 21대 국회에서 다시 처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일하는 국회와는 거리가 있다. 국민들은 일 ‘잘’하는 국회를 만들고 싶어 한다.

지난 5월 5일부터 부산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최승우 씨는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하면서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공 단식농성을 하며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과거사법이 여야의 대치로 어렵게 상임위를 통과했지만, 법사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보면 현재의 국회 작동 기제에서 이런 일 ‘잘’하는 국회를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더욱이 국회의원들과 정당들은 국민의 입법 요구(또는 입법 부작위)에 대해서 설명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않고, 그들이 반대하고 침묵하면 이를 통제할 방법도 마땅하지 않다. 입법적인 권한을 국회의원과 원내 교섭단체들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철저한 간접민주주의 제도 때문이다. 입법에 관한한 국민은 공식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입법 과정 스케치

국회가 입법한다는 것은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입법권을 국회의원들이 행사한다는 것이다. 우리 헌정질서에서 이 입법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정당을 통해서다. 정확히 말해서 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들의 원내대표들과 상임위원회 간사들의 의사일정 합의 즉 법안 심의와 처리 일정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국회 상임위원회에 배속된 국회의원들이 입법을 위한 활동을 하지만, 큰 정당들의 정치적인 타산이 개입한다. 교과서에서는 정당정치의 원리라고 말한다. 국회의 입법 논의는 사실상 정당들의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구조이다. 정당은 자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통해서 사실상의 입법권을 행사한다. 이론적으로는 총선 때 공천을 통해서 정당 후보를 내서 국민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정당도 국민으로부터 입법권을 위임받았다고 볼 수 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과 정당정치를 보장하는 또 다른 헌법적 작동원리로 입법이 된다. 여기까지는 정치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시민이면 다 아는 얘기다.

그렇다고 입법이 정당간의 합의가 있으면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니다. 집행부인 행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특히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는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입법을 추진하는 일은 삼권분립의 원리에도 저촉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가 운영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 국회 밖의 정치 공간이 마련된다. 물론 여야 정당 간의 정치적인 공방 속에서도 정당 이외의 정치 공간이 남아 있다. 국회의원들이나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론 수렴 과정이다. 원론적인 얘기를 여기서 줄이고 하고자 하는 말을 하자.

 
주권위임 - 국회의원의 입법권한 - 국민의 사후 통제”라는 간접민주주의를 넘어서

현재 우리는 간접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일은 대신해 일할 사람을 뽑는 공동체의 공식적인 행위이지만, 결국은 개인의 주권을 위임하고, 주권행사를 포기하는 내용을 담은 각서를 쓰는 일처럼 보인다. 위임받은 이들에게는 ‘권한’이 주어졌다. 국민이 주권을 넘기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후적인 선거를 통해서 한 표로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입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물론 입법청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입법을 촉구할 수는 있다. 의원소개청원과 최근에 도입된 1개월간 10만명의 국민이 동의하는 경우에 본회의에 보고하고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입법을 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입법 결정을 하는 힘은 국회의원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논의되는 것이, 국민발안제도, 국민소환제도 따위들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개헌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률로 정한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들의 권한을 견제하거나 축소시킬 가능성으로 인해 실현가능성은 높지 않다.

제한적으로 국민참여입법제도(입법배심제)를 도입하자

입법권한은 국회의원, 또는 그 국회의원들이 소속된 정당들이 이른바 여론과 정강정책과 공약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행사된다. 국민은 권한이 없다. 국회가 정쟁으로 치닫고 각종 민생 법안의 처리가 정쟁과 흥정의 대상으로 되는 상황에서는 국회는 일 ‘잘’하는 국회가 될 수 없다. 또 현실은 늘 그래 왔다.

이른바 개혁입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은 극한 입법의 포기 또는 의사일정의 장기적인 정지로 이어진다. 권한을 가진 여야 국회의원들의 충돌을 중재하거나 이런 상황을 해소시킬 방법은 마땅하지 않다. 성숙된 민주사회에서 여론이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렵다. 또 이런 대화와 타협이라는 형식적인 정치과정은 개혁을 물타기하거나 개혁을 좌초시키는 논리를 수반하는데 여야 국회 교섭단체 간의 합의가 없으면 입법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쟁점 법안을 일정한 숙려 기간이 지난 뒤에 필요적으로 심의하도록 하는 국회선진화 과정을 법제화했지만,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되었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들은 모두가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과 정당정치라는 전제에서 논의되었다. 이런 맥락에서는 여전히 국민이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국회의원의 독점적인 입법권한을 분산하지 않고 국회가 일 잘할 수 있다는 것은 나무에서 생선을 구하는 것과 같다. 나는 입법 과정에서 아주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에 국민이 직접 법안의 심의절차와 내용에 참여해 귀속력이 있는 결정을 하는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행 국회 교섭단체의 합의로 안건을 상정하고,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심의와 교섭단체 간사간의 합의처리라는 제도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두면 훨씬 더 국회가 일 ‘잘’하는 구조로 바뀔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일부 재판에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도입되었듯이, 가칭 국민참여입법제도(이하 ‘입법 배심제’)를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시민[의 상식]으로 재판을 확정하는 것이 사법의 법조 독점인 재판권을 견제하는 중요한 민주적 방식이듯이, [행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국회의 입법 과정에서 국민의 뜻을 수렴하는 딱딱한 국가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국민의 주권, 특히 국정참여권을 상시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여야의 입법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오는 대립으로 타협과 조정이 실패해 입법이 좌절되거나 법률안이 폐기되는 것을 방지하는데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입법 배심제는 입법 배심원단을 18세 이상 국민 중 법이 정한 결격사유가 없는 국민 50~1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구성하고, 그 배심원에게 여야 국회의원들이 설득하는 작업을 한 뒤 이 배심원단의 2/3나 4/5의 지지로 그 사안을 결정한다. 입법 배심제의 대상은 법안이 제출된 뒤 상임위원회나 법안심사소위원회 등의 입법 회의체에 몇 개월 또는 몇 차례 안건으로 채택하지 못한 경우와, 상정되었지만 심사과정에서 여야가 상당기간(약 1년?) 합의하지 못한 경우, 어느 일방이 그 쟁점에 대해서 입법 배심을 요구하는 경우에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 이때 입법배심원단이 결정한 것은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처리하면 되고, 국회의원은 그 결정안에 대해서 찬성 또는 반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법에 청문회 조항을 넣자는 쪽과 그걸 반대하는 정당들이 합의가 되지 않는 경우, 기존에 입법권을 가진 여야 원내교섭단체나 국회의원들은 타협안을 만들어 내든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들의 입장을 양보할 수 없을 때, 국민에게 직접 판단을 맡기는 방식이다. 이 경우 입법 배심이 남발되면 국회의원들의 무능이 드러나게되고 결국 국회의 입법권한은 약화될 수 있다. 일정한 요건의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입법이 자연 심의되고 절차적으로 본회의의 표결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국민이 입법의 속개 여부와 그 쟁점에 대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정치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국민의 입법참여가 민주적인 입법과정에서 보장되는 출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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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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