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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이라고!

[서평]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김경민( icomn@icomn.net) 2020.06.13 11:04

첫째아이가 네 살이던 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고 한 달 정도 지나 아이 어린이집에서 엄마와 함께 하는 수업이 있다고 해서 갔다. 거기서 간호사인 며느리를 대신해 손녀를 돌본다는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아이가 하나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했더니 직장을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아니라고 했더니 그 할머니 왈, “집에서 놀고 있으면 어서 빨리 하나 더 낳아야겠네!”

집에 돌아와 ‘논다’라는 말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그 할머니 말이 불쾌하거나 무례하기에 앞서 이 말 자체가 너무 신선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놀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막상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가사노동은 예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고, 다소 예민한 기질에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지금은 다행히 좋아졌지만)를 케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일하는’ 남편보다 하루 평균 2시간을 덜 잤다. 그런데 나는 이제 집에서 ‘노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로 공적인 소속이 없었던 적이 처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엄청나게 유능하고 부지런하지는 못했지만 내 할 일은 알아서 해왔다는 자부심이 나에겐 있었고,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직장도 학교였지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그런 자부심과 인정은 허락하지 않겠구나 하는 서글픈 자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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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표지, YES24)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 천년의상상, 2020)은 전업주부가 수시로 듣게 되는 ‘집에서 논다’는 말의 연원을 추적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 말이 한 개인의 분별력이나 예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사회문화적 배경, 오랫동안 쌓이고 강화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탐구한다.

“큰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부터 심장 한 구석이 찌르르했다. 그 후에 저자가 듣게 될 말, 겪게 될 일, 느껴야 할 감정을 너무 잘 알 것 같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2주 후 빨래를 개키다가 고교동창이 이렇게 말하는 전화를 받는다. “야, 정아은.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문제의 핵심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를 분명히 언급한다. “모든 일의 핵심에는 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왜 이토록 전업주부의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은 폄하되는가. 우리가 경제학이라 부르는 학문이 돈으로 환산되는 요인만 정식 구성 요소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지금 이 글을 쓴 후에 욕실 청소를 해야 한다. 나에겐 이 글을 쓰는 일보다 서서 소변을 누는 남성이 두 명 살고 있는 집의 욕실 2개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렵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일은 경제활동이지만 욕실청소는 경제활동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 원고료를 받지만 욕실청소는 해봤자 누구도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돈도 못 받는데다가 평가도 제대로 못 받는다. 내 남편과 아이들에게 내가 청소한 욕실의 상태는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값’이다. 해도 티는 안 나고 한 하면 티가 나는 것이 청소의 본질 아니던가. 사정이 이러한데도 가사 노동에서 보람과 긍지를 찾기가 쉽겠는가.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경제학의 고전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스웨덴 작가 카트리네 마르살은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다양한 경제적 요인을 따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요소를 빼먹었다. 저녁 밥상에 올릴 재료를 수합하여 다듬고, 소스를 넣고, 그릇에 담아 식탁을 차려낸 한 인물,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라는 존재를. 그 인물이 없었다면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과 빵집 주인이 아무리 자기 이기심에 충실했어도 애덤 스미스는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손길은 저녁 식탁이 무사히 차려지는 데 일조한 수많은 손길들 중 가장 복합적이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을 맡아 해냈다.” (pp.94~95) “애덤 스미스가 저녁을 차려준 어머니의 노동을 경제적 요인에 포함했다면 그 후 경제학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p.99)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어쩌면 그렇게도 남성 중심적인가! 인간이 일구어온 모든 제도, 학문, 관습이 전부 ‘인간’을 ‘남성’으로 상정한 상태로 이룩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그래도 여성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든 얼씬거리기라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경제학은 너무나 완벽하게 여성이라는 존재를, 여성이 행하는 노동을 무시해버렸다.“(pp.109~110)

 

주부가 행하는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에 정당한 임금을 국가 차원에서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반드시 이런 말이 반론이랍시고 나온다. ‘아니, 주부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는 일을 돈으로 환산한다는 거야?’ 그런가? 과연 가족이라는 집단이 오로지 사랑으로만 뭉쳐진, 일체의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서 초월한 공동체인가? 남성의 혈통을 기리고 모시는 제사를 돌아가신 분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법적 배우자 여성이 준비하는 것, 단지 며느리라는 이유로 신분이 급격히 하강하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대한민국 명절문화를 상기해보면, 부당한 지시를 하는 직장 상사, 뒤통수를 치는 직장 동료, 갑질을 하는 진상 거래처는 귀여워 보이는 수준 아닌가?

‘가사 노동에 임금을’이란 캠페인을 벌여온 이탈리아 태생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혁명의 영점》이라는 저서 서문에서 여성운동을 벌이던 초창기에는 초점을 가사 노동을 ‘거부’하는 데 두었다가 점점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옮겨 갔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 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을 거부하고 가사 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저자는 ‘집안일’이라는 용어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집안일이란 무엇인가. 집안일은 사람의 몸을 살아 숨 쉬는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여러 종류의 행동을 말한다. 몸의 살과 피가 될 음식을 만드는 행위,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의복을 깨끗이 빨아 너는 행위, 몸이 머무는 공간을 쓸고 닦는 행위 등 몸을 쾌적한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행하는 다양한 활동을 우리는 집안일이라고 부른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집안일이란 말은 이런 활동의 본질을 가리는, 잘못된 용어 같다. 생명 유지 활동 혹은 생명 보존 활동 같은 말이 훨씬 더 본래 의미를 살리는 말이 아닐까.”(p.248)

 

이 책의 외관은 독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게오르크의 지멜의 《돈의 철학》 같은 묵직한 사회과학 고전부터 비교적 최근에 나온 국내 에세이 법륜스님의 《엄마수업》, 김하나·황선우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까지 15권의 책을 텍스트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텍스트로 삼은 책과 저자 자신의 삶이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적절한 사례를 가져와서 논지를 끌어가다보니 전혀 어렵지 않게 읽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나는 가끔 페이스북에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주부로서 느끼는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을 올릴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에 대해 ‘가르치는’ 말투로 댓글을 다는 남성들이 있었다. ‘있다’가 아닌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훈수를 두는 태도에 자비심이 별로 없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발견 즉시 차단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에서 법륜스님의 《엄마수업》을 텍스트로 다룬 챕터의 제목은? ‘비구니가 《아빠 수업》이라는 책을 낸다면 어떤 반응을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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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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