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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인, 당신들은 행복한가요?_ 개혁에 대한 단상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7.30 14:50

요즘 나는 개혁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든다. 정치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 법원개혁, 국정원개혁, 또 뭐가 있더라... 그렇지 규제개혁, 공직개혁도 있었다. 개혁과 유사한 발상의 어휘로는 ‘혁명’, ‘혁신’, ‘대책’, ‘뉴딜’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거의가 정치·경제·사회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그 시대의 이슈를 만들어 낸다. 좀 더 사회를 낫게 하는데 필요한 ‘변화’를 의미하는 이런 표지들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 실천 그리고 대응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시대적인 한도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개혁’으로 통칭하는 말은 ‘시대정신’에 부합되고 거기에 맞는 실천적·제도적 변화를 가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개혁은 시대의 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수(保守)적인’ 변화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비교적 짧은 시기에 변화를 의도하는 ‘혁명’과는 거리가 먼 말이다. 그렇다고 개혁이 필요한 경우는 두 가지다. 첫째 시대에 발전과 변화에 따라 걸맞게 보수(補修)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변화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역사적인 경험으로 축적된 인간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다소 의도적인 변화인데, 선제적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지반 위에서 한다는 점에서 혁명과는 다르다.

굳이 개혁이라는 말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의 현대사가 모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적인 열망’을 잠재우거나, 또 똑같은 명분으로 ‘반동화’되기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이라는 것이 누가하는 개혁이고, 누구를 위해서 하는 개혁인가를 묻지 않고, 정치 특히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선출할 때 ‘공약’으로 대체되고, 또 언론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확신화된 생각을 갖고 비판 또는 비난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국민 주권과 병립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지금 혁명하자는 실천은 거의 없다. 혁명적인 의식이 있고, 거기에 걸맞는 제도와 운영의 틀도 제대로 연구되거나 제안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위험한(?) 발상들이 개혁이라는 말로 포섭되었다. ‘근본적인(radical)’ 또는 ‘점증적인(incremental)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급속한(speedy) 또는 단계별(step by step)이라는 속도를 의미하는 ’개혁‘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무엇이 개혁이 되었고 어떻게 개혁이 되었는가? 체감되지 않는다. 아파트 값이나 이른바 N번방 사건이나 권혁형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개혁의 범주에서 논의되지 않고, 현안에 대한 문제 제기나 그 대응과 대책이라는 맥락에서 논의가 된다. 총체적인 개혁의 의제로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이런 대응이 아무런 해법도 제기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이에 답하는 정치나 정책들은 ’개혁‘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개혁론자는 아니다. 혁명론자도 아니다. 그리고 좌니 우니 하는 이런 형식의 분류에 속하는 것도 굉장한 저항감이 있다. 나는 어떤 면에서 상황을 잘 인식하고, 거기에 걸맞는 현명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의 성향을 말한다면 상황론자에 가깝다. 상황론자라고 해서 그때그때 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일관되어야 한다. 만약 일관성이 없이 대처한다면 그것은 기만이고 사슬에 가깝다. 정치권이나 정책담당자들이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선택과 집중‘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이것은 변명이 될 수도 없고 전술도 될 수 없다. 기만일 뿐이다. 부동산문제에 집중한다느니, 이번에는 일자리 창출에, 또는 그린 뉴딜이니 어쩌고 하면서 하는 정책이나 비전들은 모두가 그 시대의 역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모두가 발전해야 하고, 모든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이런 원칙이 없는 개혁은 그들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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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성장한 것이 22년만에 최악이라고 떠드는 언론이나,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선방한 경제지표라고 말하는 구조에서 ’개혁‘은 없다. 정치적인 성과 싸움만 있다. 개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청년·장년·노년 실업자가 문제이고, 여전히 N번방 착취 구조가 존재하고 성폭행이 존재한다. 정치적인 성과를 포폄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은 언제나 정치권력에 영향을 받거나 기득권 권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변이 행복한지 봐야 한다. 정치는 그걸 봐야 한다. 개혁이란 바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도와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방편과 방식을 개혁이라고 말하는 그런 작은 지식으로 사회를 퇴행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내 이웃들은 모두 가난하다. 개혁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모두의 정의는 누구의 정의도 아니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때로 시민들은 정치인이나 정책당국자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여당 당대표에 출마한, 김부겸, 이낙연, 박주민에게 묻고 싶어 한다. 당신들은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시민들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하고,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삶을 바꿔야 하지 않은가? 당신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정책이나 정치란 무엇인가? 내 귀에 무수하게 들려오는 당신들의 답변을 떠올리면서 나는 말한다. “그건 개혁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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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법인권사회연구소

http://www.ilhr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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