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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편집자(編輯者)의 편집증(偏執症)

[서평] 읽는직업

김경민( icomn@icomn.net) 2020.10.10 13:04

출판계는 모두 알다시피 저자, 편집자, 독자라는 세 기둥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 중에서 책의 탄생과 성장과 소멸, 그러니까 책의 생애 전반에 얽힌 은밀한 프로세스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가장 잘 알고 깊게 체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자 입장에선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최초의 독자이며, 독자 입장에서는 저자와 한 팀이 되어 책을 만든 사람이다. 저자와 독자의 세계를 명확하게 분리할 수는 없겠으나 편집자는 두 세계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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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직업》 (마음산책, 2020)은 인문출판사 글항아리의 편집장이자 베테랑 기획 편집자인 이은혜가 쓴 저자 관찰기이자(1부), 편집자 애환기(2부)이며, 독자와 책을 향한 옹호문(3부)라고 요약할 수 있다. 

   

  먼저 1부 저자 관찰기. 

  편집자도 작가도 인간인지라 개인 대 개인으로는 실망하여 인연을 끊을 수도 있겠으나 편집자는 작가라는 직업군에 기본적으로 관심과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속하기가 힘든 일이 편집이기에.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이 편집자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글로 사람을 먼저 접하는 우리는 서로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정체성의 핵심(글)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게 되는 속도도 빠르고 관계의 밀도도 높으며, 헤어지면 그만큼 커다란 내상을 입는다. 이별 후에도 책이라는 실물이 남아 옛 연인이 준 물건을 버리듯 할 수 없다. 한때는 그 저자가 바로 자신의 일이자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산파 역할을 했던 편집자는 밤새 옆을 지키며 출산을 도왔던 그 산모(저자)와 아기(책)를 잘 잊지 못한다.” (p.24) 

 

 

  출산에 비유할 정도로 저자와 편집자가 함께 고군분투하여 세상에 내놓지만 이 아기(책)의 운명이 어찌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출판계의 최종 ‘갑님’은 독자인데, 저자나 편집자에게 독자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존재이므로.   

  이 책의 저자는 3부에서 이러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현 시대와 현실이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하면서 통찰과 혜안을 담아낸 책이 많은 독자에게 가닿지 못하는 독서 시장에 대한 안타까움, 그러면서도 의미 있는 작업을 포기할 수 없는 사명감이 곡진하게 드러난다. 판매 예상 부수가 달랑 천부 정도임을 알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 믿기에 출간하는 마음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책을 만들고 나면 딱 천 마리의 학만 접어 선물한 듯한 기분이 든다. 학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p.197) 

 

  또한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이런 위로와 정신승리(?)도 선사한다. 

   

   

  “누구나 알듯이 책을 사는 것은 읽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며, 한 권도 사지 않지만 다독가인 사람도 많이 있다. 나는 책에 전혀 지출을 하지 않고 많이 읽는 독자와 책은 시시때때로 사두지만 잘 읽지 않는 이들 모두를 옹호하고 싶다. 특히 후자는 매우 소중한데, 그들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꿰뚫고 있는 사람들로 언젠가 책을 읽을 계기를 맞닥뜨리면 자신이 지난 세월 헛된 곳에 돈을 쓰지 않았고 꽤 괜찮은 작가들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음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pp223~224) 

 

 

  1부와 3부도 재밌지만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부분은 역시나 2부 ‘편집자의 밤과 낮’이다. 지금껏 책 다섯 권을 내면서 여러 명의 편집자를 만났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엄청나게 꼼꼼하다는 거. 나도 생활에선 좀 덜렁대는 면이 있지만 일에서는 꼼꼼하다는 평가를 듣는데 뭐랄까, 편집자들의 꼼꼼함은 일반인의 꼼꼼함과는 장르와 차원이 다른 느낌이랄까.  

 

 

  “이런 능력은 어떻게 갖춰지는가. 거의 광적인 결벽증이 있어야 한다. 편집은 효율성과는 담을 쌓은 분야이고, 원고를 음미하면서 자기 감상을 끼적거릴 여유는 없다. 근원이 되는 자료를 찾아 연어처럼 헤엄쳐야 하고,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24시간 마음속에 담아둬야 한다(혹은 나만큼 정확한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까지도).” (pp.101~102) 

 

  “분명한 사실은 편집은 빨라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두 눈은 여백이 한 칸인지 두 칸인지도 확인해야 하고, 저자의 말이 혹시 독자의 심기를 건드리지나 않을까 수없이 점검해야 한다. 코바늘로 수작업을 하듯 더디게 편집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순식간에 대량생산을 하는 인쇄기 속으로 들어간다. 요즘 인쇄기들은 시간당 7000장에서 1만 장의 인쇄 속도를 자랑한다. 그러니 느린 편집 속도가 빠른 인쇄 속도를 만나기 전, 피곤해서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라도 오류를 더 잡아내는 게 편집자의 책무일 것이다.” (p.130) 

 

   

  그러고 보면 편집(編輯)과 편집(偏執)이 동음이의어인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편집이야말로 약간의 편집증이 있어야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물론 이런 종류의 편집증은 옳다. 책이야말로 가장 공적인 매체가 아닌가. 일단 나오면 수정도 안 되고 그대로 박제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남겨지는. 이런 것을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흑역사를 자기 손으로 쓰고 싶은 사람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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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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