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김장  출처 유네스코)

매년 김장 노동에 시달리는 환자분들에게 처음엔 이제 힘들게 담그지 말고 사서 드시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몇 년간 반복하다보니 무의미한 조언이라는 걸 깨달아 더 이상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김장을 담그느라 어깨부터 목 등 허리 무릎 손목이 다 아파져서 오시는 분들에게 치료해드리면서 “김치 담그는 법을 몰라야 고생을 안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병이에요” 라고 농을 건네면 어머님들은 깔깔 웃으면 좋아하십니다. 내심 내가 담근 김치가 가장 맛있다는 일종의 긍지 까지도 느낄 수 있지요. 매년 김장철마다 ‘원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라며 맛있는 김치나 겉절이를 갖다 주시던 분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안 주시면 김치를 못 먹어서 서운한 것도 있지만 크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웬만하면 김치 자랑을 하실 분인데 속상하실 것 같아서 말이죠.

김장이 이렇게 마음을 나누는 의미를 갖다 보니 연예인들의 사회봉사나 정치인, 특히 정치인 부인들의 사회봉사로 많이 이용되기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돈으로 김치를 사서 나눌 수도 있지만 굳이 유명인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한 데 모여 김장 담그기 봉사를 하는 걸 보면 김장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우리의 주거환경이 아파트 위주로 바뀌면서 처음에는 김장독을 어디에 묻을지가 큰 이슈였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마당에 김장독을 묻던 사람들이 마당 없는 공동주택으로 옮기자니 막막하기도 했겠지요. 지금도 간혹 아파트 단지내 공용 잔디밭에 땅을 파고 김장독을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딘가 불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 걸로 보아 아직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장독에 대한 이해심은 있는 것 같네요.

그래서 아마 한국에서만 큰 시장을 갖고 있는 제품이 김치냉장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냉동고도 아니고 일반 냉장고도 아닌 김치냉장고는 한겨울에 마당에 묻은 김장독의 온도를 아파트 안에서 구현해낸 놀라운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필수 가전처럼 되어있는 김치냉장고는 처음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었던 80년대 초에 금성 삼성 등에서 모두 개발이 되었으나 아직 소비자들의 수요가 많지도 않았거니와 비싼 가격 때문에 크게 성공을 못했는데, 90년대 중반 아파트 보급률이 높아지고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만도의 ‘딤채’ 라는 김치냉장고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에 지금의 김치냉장고 시장이 성숙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며칠 전, 아끼는 운동선수 동생이 어느 날 ‘형님, 댁에서 김치 드세요?’ 라고 물어왔습니다. 너무 당연한 걸 묻는 조심스런 질문에 웃음이 났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감사한 게 많았다며 어머님이 김장 김치를 좀 보내주신다는 얘기였습니다. 어머님이 고생하면서 담그신 김치를 감히 달라고 하기는 너무 죄송했지만 그 친구가 전북 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남도에서 담그신 김치가 탐이 나 ‘황송하지만 꼭 먹고 싶으니 염치없이 받겠다’며 주소를 불러주었습니다. 며칠 후 드디어 올라온 김치는 진짜 전라도 김치의 명성 그대로 너무나 맛이 있었고, 그 안에는 타향에서 운동하는 아들의 건강을 잘 돌봐 주십사 하는 고향 어머님의 마음까지 느껴져 말 그대로 감동의 김치인지라 다시 한 번, 김장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진: 전북 부안에서 보내주신 김장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