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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정 평화센터 앞, 강정을 상징하고 강정을 응원하는 여러 문구들과 걸개그림, 상징물과 그래피티가 가득하다.


그 옆으로 아기자기한 매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형 대가족이 조용히 앉아 사람들을 맞이한다.

 

[사진 - 들꽃님의 인형 전시회] *인형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치며, 인형의 주인공을 바로 연상시켜주는 재미가있다.

 

 

이 인형들은 예사 인형들이 아니다. 바로 2년여가 넘는 지난 세월간 강정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함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함께 울고 웃어온 여러 지킴이들을 비롯한 신부님들과 마을삼촌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모두가 들꽃님의 눈에서 각인되어, 그녀의 손끝에서 재창조되어 이렇게 인형 대가족의 모습으로 탄생되었다.

 

강정에서 삼거리 식당밥 꽤나 먹었다 싶은 사람들은 각각의 인형들을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을 지른다. 인형 하나하나가 원래 주인공의 개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보자마자 “혹시 000님 인형아닌가요?”, “이건 000님인 것 같은데..!”라며 무릎을 탁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재능은 비단 인형제작 뿐만이 아니다.

 

 

강정 곳곳의 담벼락에 그려진 아름다운 꽃그림의 벽화들. 그녀의 스케치북을 수놓은 그림들. 그리고 우산, 모자, 피켓, 강정을 알리기 위해 직접 바느질하여 밤새워 만든 여러 홍보 물품들에는 그녀의 개성과 예술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강정의 곳곳에서 그 꽃망울을 피워내고 있다.


바야흐로 강정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가꾼 하나의 커다란 꽃밭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녀의 투쟁방법은 예술적이며, 문학적이다. 제주해군기지 공사현장 앞에서 평화시위중인 지킴이들을 고착시키러 출동한 경찰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국민의 손과 발이 되어주세요!” “당신은 훌륭한 민주경찰이 될 수 있습니다.” 등의 온화한 문구를 써서 직접 보여주며, 경찰들의 경직된 마음마저 부드럽게 풀어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삭막한 공간의 경직된 순간마저 따뜻하게 어루만져, 인간적으로 바꾸어내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의 투쟁방법이다.

 

“미군기지의 아픔은 내 투쟁의 원동력”

 

[사진 - 들꽃님 ] ”해군기지 투쟁이 승리로 끝나는 날, 아름다운 강정마을에서 평생을 머물고 싶어요!” 남은 평생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들꽃님, 그러나 이 소박하고 아름답고 인정넘치는 강정마을과 마을삼촌들께 정이 담뿍들어 이젠 강정마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단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니, 이런 그녀가 어찌하여 강정에 왔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그녀가 이렇게 머나먼 제주도 남단 강정마을, 쉽지않은 투쟁의 현장까지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송탄이랬다. 소나무가 빽빽하여 수풀이 울창한 산골마을에서 그녀를 낳은 부모님은 농사를 접고, 자녀들의 양육을 위해 평택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평생을 걸친 어둡고 힘든 그늘이 될 것을 그때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미군기지 정문 앞.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가게를 열고 이사를 오신 부모님의 마음과는 달리, 윤락가와 술집이 즐비한 미군기지 앞은 양육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늘상 붉은 등이 달려있는 길거리에는 짙은 화장의 젊은 여성들이 줄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미군들을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미군들은 아가씨들을 옆에 끼고 희롱을 하며 추태를 부리거나, 술병을 길거리에 던져 깨트리며 소란을 피우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즐겨찾던, 놀이터같은 기차선로 주변을 따라서 사창가가 늘어서 있었고, 그 길이 유일하게 학교로 가는 통학길이었다. 학교에 가면 한 반에 대여섯 명은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친구들이었고, 그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로 부터 소외를 당하며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녀들을 키울 수 없었던 부모님은 서울에 계신 친척집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야만 했다. 이 때부터 그녀는 가족이 한 지붕아래 오손도손 모여서 복닥거리며 사는 소소한 삶의 일상이자 행복을 박탈당했다고 기억한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오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부터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미군들이 휘파람을 불며 쫒아와 전화번호를 묻고, 알려줄 때까지 그녀를 잡고 보내주지 않았으며, 건널목에 서있으면 슬며시 다가와 다리를 쓰다듬는 일도 빈번했단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고향집에 오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고, 나중에는 어린 조카를 등에 업고서야 겨우 안심하고 외출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마다 그녀는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기차에 탔다. 매번 반복되는 부모님과의 생이별의 슬픔을 그렇게 삼켜야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당시엔 국민학교), 그 어린나이 때부터 이산가족과도 같은 아픔을 겪으며 성장과정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녀에게 대추리 투쟁은 결코 남의 일일 수 없었을 것이다. 대추리를 함께 겪으며, 깊은 인연이 된 문정현 신부님을 뵈러 지난 2011년 8월, 강정을 방문했다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아름다운 강정마을에 주저앉게 되었다는 들꽃님. 그녀의 해군기지 반대의 결심이 더욱 남다른 것은 그녀가 바로 미군기지 문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겪었던, 기지촌이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더이상 미군기지로 인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박탈당하고 일상의 평화를 위협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한다.

 

[들꽃님의 벽화 그림 ] *아름다운 꽃그림은 들꽃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해군기지 결사반대”를 외치는 그녀의 마음 속에는 “미군기지 결사반대”의 기치가 드높다.


한미 군사협정으로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반드시 미군함대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설계과정에서 정황상 강정에 건설중인 해군기지는 미국 핵잠수함을 위한 기지임이 명백히 들어난 시점에서, 이 작고 아름다운 강정마을에 미군기지가 들어섰을 때에, 이 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주민들과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겪어야할 아픔은 바로 그녀가 겪었던 지난 날의 기억들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녀는 이 곳 강정을 지키며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라 강정의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정화하며, 해군기지 반대투쟁에 오늘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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