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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편집자 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기획취재한 '후쿠시마를 넘어 탈핵으로'를 참소리에서도 연재합니다.

 

<연재 순서>
① 쓰나미보다 거센 방사능 오염 후유증
② [기고] 시바타 기요시 신부 (예수회)
③ 원전 피난민, 누가 그들의 고향을 빼앗아 갔나
④ [인터뷰] 하야시 히사시 신부 (예수회 일본관구 사회사도직위원장)
⑤ 원전 없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
⑥ [인터뷰] 사와무라 가즈요 (핵발전소 필요없다 시모노세키 모임 대표)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엔 사라진 풍경이지만, 과거에는 광부들이 갱도에서 작업할 때면 꼭 카나리아 새를 데리고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유달리 유독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가 갑자기 거친 날갯짓을 하고 불안하게 지저귀는 이상 행동을 보이면 광부들은 그걸 신호로 삼아 즉시 밖으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핵발전소 필요 없다! 시모노세키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와무라 가즈요 씨는 어쩌면 카나리아 같은 인물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이 화력발전을 대체할 ‘미래의 대안 에너지원’으로서 핵발전에 주목하면서 너도나도 발전소 건설에 뛰어들던 시절, 일찌감치 핵발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반대의 날갯짓을 해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핵발전소 필요 없다! 시모노세키 모임’ 대표 사와무라 가즈요 씨 ⓒ한수진 기자

 

“핵발전소에 맞서 싸우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네요.” 돋보기를 매만지며 웃는 사와무라 씨는 일흔을 훌쩍 넘긴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였다.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뛰어든 지 올해로 벌써 35년째라고 하니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활동가인 셈이다.

 

“1977년의 일이었어요. 어느 날 쥬코쿠 전력회사에서 야마구치 현에 핵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어요. 건설 예정지를 보니까 이곳 시모노세키에서 아주 가까운 호호쿠였죠. 당시만 해도 핵발전이 무엇이고 어떤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책을 뒤져보니까 발전에 사용된 원료를 농축하거나 재처리하면 그 자체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료가 된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과 함께 소식지를 만들고 강연회, 사진전, 영화제, 서명운동 등등 안 해본 게 없어요. 심지어 산에 있는 나무를 사서 일일이 이름표를 다는 운동도 했습니다. 기존에 심어진 나무에 값을 지불한 뒤 이름표를 달면 법적으로 그 나무를 벨 수 없거든요.”

 

거기에다 전력회사가 지주들을 회유해 땅을 매입하는 걸 막으려고 미리 땅을 사서 공동지주 형태로 바꾸는 운동도 벌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주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전력회사가 1년 만에 계획을 백지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뒤이어 이어질 투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쥬코쿠 전력은 5년 뒤인 1982년 세토네해에 위치한 가미노세키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발전소 예정지와 그 주변 지역 어업협동조합 8곳 가운데 7곳이 발전소 건설에 찬성하는 쪽에 손을 들어줬다. 유일하게 이와이시마 조합 한 곳만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초반부터 싸움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어요. 그래서 내심 ‘야, 이거 어렵겠구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이와이시마 조합 어민들과 주민들이 정말 열심히 싸워줬어요. 그 와중에 정부는 어민들에게 어업보상금을 받으라고 갖은 회유와 협박을 다 했어요. 일단 보상금을 받으면 어장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되거든요. 하지만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을 견디며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자랑스럽죠.”

 

원래 은행원이었던 사와무라 씨는 남편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운동에 전념했다. 강산이 세 번을 넘어 네 번째 바뀌어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연 그는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이른바 ‘비국민(非國民)’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더 심했어요.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은 물론이고 편지에다 죽은 곤충들을 잔뜩 넣어서 보낸 경우도 있었고. 나뿐만 아니라 반핵운동을 하는 전국 곳곳의 활동가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의 뒤를 이을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나마 작년 3월에 강연회를 계기로 30대의 젊은 활동가들이 여러 명 생겨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당분간은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건설이 진행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 그러나 사와무라 씨는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처지다. 시모노세키가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지역구라서 언제 다시 매립작업이 재추진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부와 전력회사가 당초 매립공사에 착수하려던 계획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 나는… 반핵운동을 하면서 언젠가 사고가 터질 거라고 말해왔어요. 그러다 1986년에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건이 터졌고, 또 15년 뒤엔 이 나라에서 똑같은 사고가 터진 겁니다. 제가 무슨 예지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핵발전 자체가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고, 그게 현실이 됐을 때 그 결과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한국도 영광발전소 외에는 핵발전소가 모두 동해안에 위치해 있고 일본과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잖아요? 즉 어느 한쪽이라도 사고가 나면 두 나라가 모두 똑같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란 거죠. 그래서 더더욱 두 나라 시민들이 단결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사와무라 씨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했다. 수십 년을 반핵운동에 몸담았으면서도 핵발전을 막지 못해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와무라 씨의 뒤를 이어 깨어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정말로 미안해야 할 사람은 사와무라 씨가 아니라 아직도 ‘값싸고 깨끗한’ 핵발전이라는 미련과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오래전부터 핵발전이 가져올 위험을 경고해왔던 ‘카나리아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왔고, 지금도 닫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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