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기획

"사회복지사가 꿈이에요. 꿈이 거창할 필요 있나요. 조금씩 키워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고요."

 

강제노동과 성폭력 은폐·공금 유용 등의 혐의가 드러나 논란이 일었던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전주 소재)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지 한 달가량 지났다.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산하 시설에 있다가 정신병원에 입원, 자립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전우열(가명·35, 지적장애인)씨를 만난 건 지난 15일. '꿈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위와 같이 답했다.

 

그는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측의 강권으로 2개월가량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 이후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내 시설에 있던 장애인들이 다른 시설로 이주되면서 그는 자립생활을 택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그런 전우열씨를 '학대'했다.

  

▲자립 첫날 6월 15일, 전우열씨는 사야할 것들을 적었다. 10여 평의 작은 집에서 시작하는 자립생활이지만, 밥솥·선풍기·이불 등 당장 사야할 것도 많다.
▲마트에서 자립을 돕는 전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병용 활동가와 함께 살 것들을 확인하고 있다.

  

전우열씨는 모진 학대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했다. 35년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작은 집도 구했다.

 

"어제(14일) 처음으로 내 통장에서 돈 5만 원을 뽑는데 손이 덜덜 떨렸어요.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떨리던지…. 이제 평범하게 잘 살고 싶어요."

 

"전 벌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2009년 9월 방영된 SBS TV프로그램 '긴급출동 SOS'는 시골농장에서 강제노역 및 폭력에 시달리는 전우열씨의 사례를 고발했다.

 

전우열씨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9년 가을, SBS TV프로그램 '긴급출동 SOS' 때문이었다. 그는 1996년부터 2009년 가을까지 전남의 한 시골농장에서 13년 동안 돼지 2500여 마리를 농장주 대신 키웠다. 그의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돼지 밥을 주는 것으로 시작해 늦은 밤 돼지 똥을 치우는 것으로 끝났다. 임신한 돼지가 있으면 그날은 밤을 새워야 했다. 농장주는 매번 술 마시고 전우열씨를 쇠몽둥이로 때렸다. 그래서 지금도 전우열씨는 비가 오기만 하면 허리와 다리가 쑤신단다.

 

"어릴 적에 누나와 싸우다 칼을 던진 적이 있어요. 그일로 충격을 받아 농약을 마셔 이가 다 망가져 버렸어요.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어요. 살아오면서 전 이런 벌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제 자신을 많이 학대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전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나와 상경하고나서부터 세상은 그를 이용하기만 했다. 어느 버스회사에서 3개월 동안 세차를 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또 목욕탕에서 2년 동안 살면서 일을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한 달 내내 아침·점심·저녁으로 짜장면만 먹는 날도 있었다. 전우열씨는 계속 임금을 달라고 했지만, 목욕탕 주인은 50만 원이 든 통장을 보여줬을 뿐이다. 전우열씨는 결국 그곳에서 25만 원을 들고 나와 전남의 한 시골농장으로 갔다.

 

그가 시골농장에서 13년을 버틴 이유는 사람에 대한 정과 어렸을 적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립하고 싶다고 하니 정신병원에 보냈어요"

"그동안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어요. 사람이 존중받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전우열씨는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2009년 돼지농장에서 나와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고 동료 장애인들과 친해지면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사는 듯했다. SBS '긴급출동 SOS' 팀이 1년 뒤 다시 찾은 전우열씨의 모습도 그랬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꿈이 사회복지사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년 반가량이 지난 뒤, 그가 있었던 곳은 김제의 한 정신병원이었다.

 

"(시설에서) '자립을 하고 싶다'는 표현을 처음부터 많이 했어요. 화가 날 때도 '나가고 싶다'는 말을 했지요. 내가 여기서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곳(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은 잘못을 하거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보내버렸어요. 저는 정신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면 '보복'을 하니까 무서웠어요."

 

전우열씨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는 공부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본인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마음에 방송통신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올해 초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며칠만 있다 나올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전우열씨를 입소시킨 뒤 잠시 야학 등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을 뿐 그의 자립을 전혀 돕지 않았다. 이는 다른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본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이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벌인 전수 조사에 따르면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내 시설들에서 ▲ 관리자 소유의 농장 및 외부작업장 등에서 노동력 착취 ▲ 1차 피해 보상금 등 거주인 소유의 재산 갈취 ▲ 거주인 간 성폭력 발생 시 사후조치 없이 수년간 은폐 ▲ 징벌로서 정신병원 강제입원 및 자립생활지원 전무 ▲ 여성 거주인들의 외출 불가 및 자기결정권 침해 ▲ 거주인들을 위한 일상프로그램 부재 등의 인권침해상황이 벌어졌음이 밝혀졌다.

 

"처음 몇 개월 동안 연구소(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농장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으니까 나가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오후 4시에 밥을 먹고 오후 5시에 잠을 잤어요.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 방 청소하고…. 그렇게 지냈죠. 그리고 작년에는 메리야스 박스 접는 일을 했어요. 한 건당 15원 정도인데, 연구소에서 '번 돈으로 태국을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엄청 했어요.

 

모두 가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저와 형들 몇 명이서 오전 4시에 일어나서 미리 준비를 했죠. 그래야 접기도 쉽고 빨리 접으니까요.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박스를 접었어요. 저녁에는 다음 날 할 거 미리 준비해놓고…. 내가 하루 접는 양이 있는데 그보다 많이 해야 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1년 했는데도 좀 부족하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오전 3시에 일어났죠. 아저씨들은 오전 2시에 일어나서 일하기도 했어요."

 

JTV(전주방송)는 "이렇게 박스포장으로 얻은 수익이 지난해 1000만 원이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 돈은 소장과 이사장이 관리해왔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동료들과 함께요"

  

▲ 구속된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장은 5월 27일 전우열씨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어 보상금을 입금했다. 현재 다른 장애인들은 기존의 보상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전우열씨는 지난 14일 정신병원에서 나왔다. 하지만 시설에 있던 장애인 20여 명은 5월 29일 모두 다른 시설로 옮겨졌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 아저씨들하고 소장이 없을 때는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재미있게 놀았거든요. 같이 모여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서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주면 되니까, 모두 나와서 살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이제 뭐가 필요한지 다 아니까요. 제일 친한 영수 아저씨와 아파트를 구해서 같이 살고 싶어요. 그 아저씨가 몸이 불편해서 도와주다 친해졌거든요."

 

하지만 전우열씨는 아직 동료들을 보지 못했다. 김병용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상담을 해보니 자립이 가능한 분들이 있었지만 자립을 위한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이전 시설이나 학대받던 곳에서 받은 보상금을 소장과 이사장이 관리해와서 정확한 액수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전우열씨가 먹고, 자고, 생활하게 될 방

▲전우열씨는 올해 방송통신고 1학년에 입학했지만,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립을 하면서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돼 기뻐했다.

 

사실 전우열씨가 자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 시골농장에서 구조되면서 재판을 통해 받아낸 보상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보상금은 이사장이 관리해왔는데 전북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제가 터진 5월 말, 그의 통장에 이 돈이 입금됐다. 그는 이 돈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애인들의 보상금은 현재 정확한 액수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상태다. 그의 바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전주시의 '자립 지원'이 필요하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너 행복하니?'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동안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라고요. 사지 멀쩡하고 걸을 수 있고…. 이렇게 행복하다는 마음을 먹으니까 몸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제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전우열씨는 당분간 보호작업장 내에서 일을 하게 될 전망이다. 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문의해 학교 생활도 다시 하고, 전주교대 인근에 있는 상담치료센터에 정기적으로 다니면서 마음의 상처도 치유할 예정이다. 오랜 죄책감의 세월을 씻고 세상을 향해 스스로 첫발을 내디딘 전우열씨. 1년 뒤 그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부디 지금 만난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길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동시 게재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