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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차별과 혐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인터뷰] 전북 전주에서 강남 여성 살인사건 추모의 벽을 지킨 김영지씨

문주현( jbchamsori@gmail.com) 2016.06.15 16:51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다음 생에는 함께 살아남자 친구야’


지난 5월 23일부터 전북대 구정문에서 약 200M 떨어진 지하보도 한 쪽 벽이 추모의 메시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죽었고, 남자라서 살아남았다”, “부디 이딴 일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한 메시지가 또 다른 메시지를 부르듯 추모의 벽은 채워졌고, 1주일 동안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의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여러 발걸음들이 머물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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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전북대 구정문 인근 지하보도에 '강남 여성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5월 17일 새벽 1시경 강남역 인근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서른 세 살의 남성 김모씨가 화장실에서 대기하고 남성 여섯 명을 보내고 여성 한 명을 식칼로 찔러 살해했다. 


경찰 조사에서 피의자 김모씨는 ‘여자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진술한 것이 공개되면서 시민들은 피해자를 기리기 시작했고,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의 벽’이 생겼다. 강남역에서 약 300Km 떨어진 전북대 앞 지하보도 강남 여성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의 벽. 참소리는 이 추모 벽을 만든 당사자 중 한 사람을 만났다. 전북대에 재학중인 김영지씨. 25살의 여성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영지씨에게 이 사건은 결코 남의 일처럼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만약 거기 있었다면 여자라는 이유로 죽을 수 있었구나,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강력범죄 80%의 피해자가 여자라는 통계를 봤어요.”


운이 나쁘면 강간도 당하고, 살해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영지씨는 이 사건을 접하고 강한 의문을 가졌다. 이런 영지씨의 마음과 통하는 이들이 전북대에도 있었다. 전북대 인권동아리 ‘동행’과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을 하는 전북대 학생들이 바로 그들.


당초 이들은 추모의 벽을 전북대 안에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전북대 학생회에 요청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학생회 허락 없이는 벽보를 붙일 수 없어서 추모의 벽은 지하보도로 오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 물론 죽은 것은 안타까운데 전국적으로 추모를 할 정도로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냐고 물어요. 전 이렇게 답을 했어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하는 것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으로 봐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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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에 설치된 '강남 여성 살인사건' 추모의 벽을 훼손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글을 테러하는 세상”


전북대 앞 지하보도에 추모의 벽은 5월 23일부터 28일까지만 운영됐다. 전북대 추모의 벽에 게시된 추모글들은 서울여성가족재단으로 보내져 현재 전시 중에 있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자리를 지켰지만, 추모의 벽을 훼손하는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를 영지씨는 ‘테러’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필기도구를 가져가고 약간 떼는 정도여서 귀엽게 봐줄 정도였어요. 그런데 3번째는 제가 우드락에 써놓은 것을 부숴놨더라고요. 밑에다가는 ‘여자가 벼슬임?’이라고 써놓고요. 그 다음에는 포스트잇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주워온 적도 있었어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조사는 추모의 벽의 합법성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추모 포스트잇을 훼손하는 행위는 정당한 의사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공권력에 도움을 기댔지만 실망만 느꼈다.


물론 지난 1주일 동안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을 정말 아프게 받아들이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이들도 많았다. 영지씨는 1주일 동안 전주 시민들이 붙이고 간 포스트잇을 통해 더욱 마음 깊이 이번 사건을 애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공감한 추모 메시지를 소개했다.


‘당신도 나처럼 꿈이 있는 학생이었을텐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꿈을 잃은 25살은 내가 되었겠지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가해자의 꿈이 무엇인지는 언론을 통해 알고 있잖아요. 분명 피해자도 꿈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저랑 동갑이에요. 그 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처럼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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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와 차별, 공기처럼 존재하죠. 한국은...”


영지씨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당한 성폭력에 대해 정리를 해봤다고 한다. 언어적 성희롱은 일상이었다. 당장 기억 남는 언어적 성희롱은 3번. 지난 1년 동안의 일이었다. 영지씨는 “한국에서 여성혐오와 차별은 공기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일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외모에 대한 지적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통통하다거나, 살을 빼라거나, 성형을 어디를 하면 예쁠 것 같다거나... 남자인 친구들은 외모 평가를 모의하고 순위를 정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들었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영지씨는 ‘그때는 코르셋을 입고 있었던 것 같아요.’라는 표현을 했다. 여성 보정 속옷인 ‘코르셋’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외모에 대한 평가와 여성에 대한 성적 표현들에 대해 그 역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랬던 영지씨가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1년간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난 후부터다. 전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뉴질랜드. 그곳에서 사는 1년 동안 영지씨는 일상적으로 들었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생활용품점에서 일을 했던 영지씨는 당시 지인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너무 무례한 것 아냐”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특히 출산휴가를 쓰는 것에 개이치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출산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병원에서는 축하를 해주고, 남자들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우리와 다르죠.”


여성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 문제는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영지씨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 여자 선배가 취업 준비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하다는 말을 제게 했어요. 취업시장에서 여성이 설 자리가 너무 없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이 분은 증권회사 면접을 봤는데 20명 중 2명이 여성이었다고 해요. 이 분이 면접을 보고 다른 선배에게 기업에 대해 물으니 ‘그 증권회사 어차피 여자 안 뽑아’라는 답을 들었다고 해요. 무척 스펙도 좋았는데요”


흔히들 여성들의 고용률을 ‘M’자형 구조라고 말한다. 20대와 30대 취업으로 고용률이 높아지다가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발생하며 떨어졌다가 5~60대에 단순 노동에 종사하면서 고용률이 높아지는 구조.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이 구조가 나타나는 것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영지씨는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이 기이한 구조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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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가족재단에 전시 중인 전북 전주 추모의 벽 추모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준비한 전북 전주에서의 추모 행사는 1주일로 끝이 났다. 영지씨를 비롯해 추모 행사를 준비했던 이들은 이제 다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추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혐오와 차별을 넘어서보자는 기획으로 시작하는 독서모임이다. 이들은 변화의 시작을 ‘페미니즘’으로 꼽았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조차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여성 우월주의 운동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모든 차별을 없애려는 담론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성적 격차를 줄이자는 이야기에서부터 성소수자 내용까지... 모든 차별을 없애는 것,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6월 5주차부터 7주간 전북 전주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의 모토는 ‘여름방학, 여성주의를 만나다’이다. 여성주의, 남성성, 여성 혐오라는 3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이와 관련된 책들을 읽고 평등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사건은 저에게 페미니즘을 더 알리고 행동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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