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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 안락함과 편안함이 있는 곳 중에 하나가 고향집일 것이다. 전주에서 3시간을 휠씬 넘어서야 도착하는 시골집에 다다르면 어릴 적에 미꾸라지 잡고 헤엄치던 냇가와 함께 주인 왔다고 짖어대는 누렁이 ‘멍멍’소리가 요란스럽다.

닫힌 대문을 열면 떨어져 나갈 듯이 꼬리를 흔드는 누렁이 머리를 한번 쓱 만지고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 멀리서(?) 형이 한참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엉덩이 걸음으로 힘겹게 나오고 있다. 얼른 형 얼굴 앞에 최대한 내 얼굴을 갖다 대고 흐느적 뻗는 형의 손을 잡고 ‘형, 나 왔어’ 하면 어눌한 말투로 ‘응, 어서 와’ 하며 반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반가운 몸짓과 표정으로 반긴다.

나를 이토록 기쁘게 반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을까! 가득찬 행복감이 고향집의 편안함과 더해져 구름을 걷는 기분이 된다.


‘장애인’이 된 형

형은 1급 뇌병변 장애인이다. 8년 전에 몸이 이상해 이곳 저곳 병원을 다니다가 아주 큰 대학병원에 가서야 진단을 받아 확인한 것이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몸의 평형감각과 감각기관을 담당하는 소뇌의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는 그러다가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죽고 마는, 발병원인도 치료방법도 모르는 그야말로 ‘희귀’병이었다.

하지만 나는 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집은 지병 때문에 평생을 앓아누워계시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끌었다. 온 식구들은 어머니를 대신에 아버지 병간호와 온갖 집안일을 하나씩 맡으며 집안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장남인 형은 장남으로서 가지는 시골의 전통적인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도 동네 불량배 짓에 나중에 학교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돈이 생길 때마다 가져다가 없애버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식구들이 이제야 좀 살 길을 찾아 여유를 하나씩 찾아갈 때 형은 ‘몹쓸’ 병까지 몸에 단 장애인이 되어 집에 나타났다. 거기다가 여기저기 은행빚에 사채까지 주렁주렁 달고 온통 집안을 먹장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오랫동안 아니 거의 모든 유년기와 학창시절과 청년기를 병든 아버지를 간호해 본 식구들은 또 다시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악몽’이 너무너무 싫었고 더우기 그 당사자가 집안 일은 한번도 거들떠 보지 않은 그 잘난 ‘장남’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이 불가능한 형은 이혼해야 했고 어린 두 조카들과도 눈물어린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은근히 미안했던 형은 고생하는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에게 누가 될까봐 병든 장애인의 몸으로 서울로 떠났다. 환우회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으로 간 것이다.

그 뒤로 몸이 더 안 좋아진 형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형은 장애인이 된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긴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지난 날의 모든 생을 깊게 성찰한 어엿한 ‘장남’ 으로 돌아온 것이다.


‘형’이 된 장애인

나는 지금 전주에 살고 있고 형은 고향집에서 팔순이 다 되어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어머니는 새벽에 시장에 일 나갔다가 저녁에서야 들어오시는 데 그 사이에 형은 혼자서 식사를 비롯한 온갖 일상을 활동보조인과 함께 잘도 해치운다.

또 집안에 급한 일이 생기면 떨어져 사는 식구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도 취하면서 멀리 사는 형제들에게 나이드신 홀어머니 걱정을 꽉 붙들어 매게 하는 ‘효자’ 장남이 되었다. 아마 형이 장애인이 안 되었더라면 누가 어머니 곁에 있었을런지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올해 설에는 집에 갔을 때 형이 지역신문에 난 자신의 기사를 보여주었다.

"몸은 아파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 있어
하나님은 병 주신 대신 긍정적 사고와 웃음 선물"


소뇌위축 환자 김00씨
소뇌 세포가 하나하나 죽을 때마다 몸도 죽어간다. 6개월 전까지 만해도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형태만 겨우 보일 뿐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1주일에 3차례나 볼 정도로 좋아했던 영화. 이젠 보지 못한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일도 지금은 추억으로만 꼭꼭 간직할 뿐이다.

김00(읍 해리)씨. 그가 앓고 있는 병은 소뇌위축이라는 희귀질환이다. 소뇌 세포가 죽어갈 뿐 재생하지 못하는 병이다. 병 진척도 빨라 2년 사이에 시력도 거의 상실했고 말도 어눌해졌다. 몸도 혼자 걷기 힘들 정도로 중심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 있다. 웃음이다. 긍정적인 사고와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다. 하나님은 병을 준 대신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줬다고 말하는 그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산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남과 더불어 산다는 지혜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삶에 감사하는 마음도 갖지 못했을 것이란다.

30대 초반에 이 병이 찾아왔을 때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유통분야에 종사했던 그는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 앞날이 밝은 촉망 받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내가 더 중요하고 지금의 삶을 더 소중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일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휠체어에 의존하며 남의 손에 기대야만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그이지만 한국소뇌위축 환우들의 모임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다. 얼마 전에도 휠체어에 의존한 채 홀로 서울을 다녀왔다. 서울에 있는 모 종합병원에서 3년간 희귀병환자들을 무료진료 해준다는 협약식을 체결하고 온 것이다. 그는 장애인용 컴퓨터를 이용해 온라인상으로 회원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모임을 관리한다. 최근 들어서 신체의 기능이 급속도록 떨어지자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글을 올리고 있다.
온라인상뿐 아니라 1년에 1∼2회 정도 세미나나 토론회 등을 기획해 서울에서 행사를 여는 일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에는 회원들을 모아 제주도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며칠 전 그는 몹시 앓았다. 세포가 죽어가고 있다는 증상이다.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진통이 왔고 몸에도 통증이 밀려오면서 마비 증상이 왔다. 그 증상을 겪은 후에는 여지 없이 몸에 변화가 온다.
그래도 그는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신력으로 버텨낸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꾸려나가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웬만한 아픔은 혼자 견뎌낸다.
다시 건강해진다면 홀로 된 노인들을 모시고 살고 싶다는 그.
새해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얼마든지 세상을 껴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기 때문이다.

해남신문 2009년1월5일(월) 박영자 기자 (hpakhan@hnews.co.kr).

[글쓴이 덧붙임] 기사 원문에는 실명으로 되어 있으나 이 글에서는 형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내가 바라 본 형의 사적영역이 드러나 있어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장애인과 가족으로 살기

▲장애차별 개선과 인식변화를 위한 인권교육워크숍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안에는 장애인이 많았다. 6·25한국전쟁 때 한쪽 다리를 잃고 농사지었던 큰아버지, 돈 벌러 뱃일 나갔다가 사고로 한쪽 팔이 없어진 고모네 큰형, 그리고 내가 어린나이에 겪었던 00장애인이었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둘째누나 이들 모두는 가족 안에서는 소중한 식구였지만 가족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나가다가 한번씩 더 봐지는 사람이었고 아주 낳선 외부인에는 감추어야하는 특별인이 되야 했다.

사실 가족 안에는 ‘장애인’이란 것이 없다. 이미 익숙하고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가족이기에 그런 것이다. 내가 장애인이 된 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은 형의 실업과 빈곤이었다. 이 사실을 밀어내고 회피했던 내 안의 ‘장애’를 제거하는데 나에게는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장애로만 오지 않고 실업과 가난을 같이 끼고 오는 사회적 장애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은 생계와 운명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공동체였기에 가족 구성원 한사람의 부족한 역할은 모두의 노력으로 부족하나마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은 경쟁과 효율의 빠른 사회질서 속에서 생존을 위해 온 식구가 혼신을 다하지 않으면 가족전체가 도태되는 현실에 놓여 있다. 따라서 정상적 생존능력이 취약한 장애인이 가족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가족전체를 위기에 빠트리고 마는 꼴이 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사회 전체가 ‘큰’ 가족이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권위적인 가족의 확장이 아니라 순기능으로서 가족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는 한 가족 아닌가? 전체사회가 가족처럼 형제자매애(愛)로 관계 맺음 되는 것이 인류의 오랜 지향이지 않은가? 사회전체가 장애인과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두가지 정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형제자매처럼 일상에서 자주 만나고 자주 대화해야 한다. 장애인과의 소통의 일상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쩌다 한번씩 보이니까 낯설고 특이한 것이다. 장애인들과의 소통의 일상화가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

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 그리고 ‘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가 그 출발점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이 사회적 일상에서 자주 드러날 때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편견’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약자에 대한 배려의식을 키워내서 ‘착한 국민’의 동정심과 연민에 의존하는 의식개혁형의 편견 해소방식만으로는 ‘베푸는 자’ 와 ‘베품을 받는 자’로 사회적 신분을 나누어 또하나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둘째로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같은 장애인에 대한 고급교육과 충분한 생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

지금의 장애인 수당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정도의 최저의 생존기금이 아닌 인간으로써 충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계보장과 인간의 잠재된 능력을 계발하여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육권을 완벽히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당연한 보편적 권리로서가 아닌 장애인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지 못한 특별한 감각능력과 그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발생한 깊은 감성능력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예술분야와 학문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장애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단지 사회적인 소외로 인해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본능적 아집이 두껍게 가리고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이런 아까운 인류의 자산을 썩히는 낭비를 계속해서는 안된다. 안마사나 단순기능 직업훈련을 시키며 사회적 진출이라고 치켜세우는 부끄러운 자랑을 언제까지 계속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정보와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갈수록 소외되고 기계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는 소통과 연대의 지혜가 절실하다. 이 지혜를 다른 데가 아닌 바로 장애인들에게서 찾아내고 발전시켜 내면 된다.

소외의 극단의 서 있었던 장애인들의 감성과 사회적 경험 안에는 극단으로 치닫는 단절의 사회를 극복하는 해결책이 들어 있지 않을까? 장애인의 특별한 잠재능력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교육대책은 인류가 한 걸음 더 진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제일의 과제라 생각한다.

이처럼 사회전체가 장애인과 ‘큰’ 가족이 되면 더 이상 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니고 그냥 우리의 소중한 형제자매가 될 것이다. 스티븐호킹 박사가 물리학자이지 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은 인류라는 종(種)안에서 가장 평화로운 존재이며 가장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다. 이런 장애인들과 한 식구가 된다는 것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세상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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