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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를 불편하게 했던 '인권영화'

강문식( 1) 2007.12.02 09:45

‘다섯 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원하여 제작한 영상이다. 이 영상은 옴니버스 방식을 취하고 있고 여러 감독들이 ‘인권’이라는 주제로 제작한 영상을 모은 것이다.

국가인권위에서 기획한 이런 영상 시리즈는 ‘여섯 개의 시선’이 처음이었고, 그 작품은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는데, 직접 보러간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상영은 나를 여러모로 불편하게 했었다. 그 불편한 기억 때문에 ‘다섯 개의 시선’을 보기 전에 이 영상은 어떨 것이라는 규정이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섯 개의 시선’을 관람했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 몇 년 전과 지금 나의 바라보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곱씹어 보며 관람을 했다.

그 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

‘여섯 개의 시선’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인권’에 대한 부분을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어떠한 텍스트도 맥락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듯이,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영상을 독해할 때는 반드시 그 외부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 외부를 곁들여 ‘여섯 개의 시선’을 본다면 지금도 불편하다. 불편해야 한다.

이 시대에 ‘인권’이라는 단어는 너무 흔한 말이 되어버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인권’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쓰이는 ‘인권’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고정된 무엇이 되었고, ‘인권’에 영구적인 정의가 있는 마냥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의만큼 이루어지면 ‘인권이 보장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이 사회는 대체적으로 인권이 보장되었고, 사소한 문제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 ‘인권’을 들먹이면 배부른 소리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는다.

지금 쓰이는 ‘인권’의 정의가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마냥 취급되지만, 실제 ‘인권’이라는 말의 역사는 기껏 300년을 채 넘지 않는다.(당연히 그 이전에 지금의 ‘인권’이 담고 있는 이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이념이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지지받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역사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인권’에 담긴 내용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해왔고, 대략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불가침의 권리라는 것이 인정되기 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 했다.(이런 한 문장으로 그 치열했던 역사를 축약하는 게 모독 같지만..) 사회의 주류적인 통념이 이야기 하는 ‘인권’은 단지 현재 동의를 이끌어낸 범위에서의 권리일 뿐, 그것이 완성된 형태일 수 없다. ‘인권’이란 무엇이 보장되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어떤 과정으로 구성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단지 주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인권’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사회에서 쓰이는 ‘인권’은 분명 상충되는 어법 속에 있다. 이미 완성되어 보장되어 가는 ‘인권’이 있고, 태생적으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하는 ‘인권’이 있다. 전자는 ‘인권’이란 단어에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삭제한 채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여섯 개의 시선’은 의도적으로 그러했다.

그 상영에서 불편했던 건 영화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독과의 대화에서 던져지는 질문과 답변 때문 쪽이 더 컸다. 사람들은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하기 보다 영화 속에 설정된 장치들에 대해서만 물었고(인권에 대한 내용에는 문제가 없다는 듯이),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를 ‘인권영화’로 규정하며 이 영화의 기획이 그동안의 ‘인권영화’가 가졌던 무거운 문제의식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고 공공연히 이야기 했다. 인권은 그렇게 박제화 되고, 찬양되었다.

‘인권’과 별개로 ‘인권영화’라는 단어가 보통명사화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도 싸움의 역사다. 이적표현물을 상영한다며 인권영화제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되고 봉쇄되던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인권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거는 것만으로 공권력과의 갈등을 각오한 투쟁이었다. 그 ‘인권영화’를 탄압을 무릅쓰고 대중적인 공간에서 상영하려던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인권영화’가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 때 국제영화제에 모인 감독들은 이런 ‘인권영화’의 역사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듯 했다. 영화에 ‘인권’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그것이 ‘인권영화’라는 식의 이야기는, 그 몰역사적인 의식에 혐오감이 일 정도였다.

그리고 ‘여섯 개의 시선’ 작품 자체에서 느꼈던 불편함 중 가장 큰 것은 어떤 문제가 따로 동떨어져 존재하고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이 이야기하는 문제제기 방식이었다. 심지어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재수 없던 개인이 겪은 재수 없던 이야기라는 식으로 치부해 버렸다.


‘다섯 개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다섯 개의 시선’도 ‘여섯 개의 시선’에서 보여준 시선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우선 작품별로 느꼈던 점들을 간략하게 적어나가겠다.

‘다섯 개의 시선’은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라는 작품으로 시작한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은혜가 주인공인데, 일상에서 은혜의 발언은 묻혀버리기 십상이고 누구에게나 불완전한(귀찮은,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받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주위 사람들에 대해 은혜가 친구에게 털어놓는 말은 “(그 사람들을)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이다. 물론 이 대사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은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문구를 쓰는 것은 불편하다.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에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라면, 그 노력은 지금 더 권력을 가지고 있는 편 - 그러니까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불편함을 제공한 편에 할당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래서 은혜가 먼저 이해하거나 이해하길 강요당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들에 대해 은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해하는 것 외에 제시되지 않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리라.

전반적으로 그 일상적인 상처들, 부딪힘이 세심하게 표현되고 가슴 깊이 다가와서 좋았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한 주인공 은혜가 실제 장차현실씨의 딸이라는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고,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는 유치한 반가움에 기분 좋아했다.)

<남자니까 아시잖아요?>에서는 술취한 대한민국 남성의 술주정을 통해 여성, 동성애, 이주노동자, 학벌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까발린다. “남자니까 아시잖아요?” - 닫힌 구획을 설정하고 그 틀 안에서 ‘우리끼리’ 공유하는 것으로 동질성을 유지하는 패거리문화. 권력은 욕망하는 편의 반대쪽 욕망의 대상에 존재한다. 이 구획 안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은 권력에서 소수화된다.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는 “(같은) 이성애자니까 아시잖아요?”, “(같은) 한국인이니까 아시잖아요?”, “(같은) 서울대니까 아시잖아요?”등의 수많은 물음으로 등치된다. 우리는 ‘우리’라는 동일성을 전제하는 서술들에 얼마나 익숙한지.

<배낭을 멘 소년>는 탈북청소년들의 이야기이다. 남쪽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배정받지 못한 이들의 생활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주체로서 발언할 자리가 없이 허공에 떠있다. 발언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이들이 발언하고자 했을 때, 이들의 발언이 정략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올곧게 펼쳐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영화는 북에서 온 이들이 이 사회에서 정착하기 어려운 것은 굳게 둘러쳐진 사회의 편견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현실의 한 부분만을 보여주며 그것으로 문제를 한정짓게 만드는 것 같아 불편했다.

<고마운 사람>은 전개는 경쾌하다. 비정규직 수사관과 조사받는 학생의 관계가 아이러니하게 변화하며 진행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너무 불쾌한 영화였다.(불편하다는 단어로 부족했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학생이 외치는 구호는, 이 사회가 저항하는 이들을 '운동권‘이라고 금을 그어 격리시키고 그들에게 뒤집어씌운 이미지로 이루어진 현실과 동떨어진 선언적인 내용들이었고, 그래서 그 장면은 희화화된다.(내가 생각할 때 이 희화화는 감독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학생이 현실의 모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인 것을 연출할 수 있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가볍게 만들려고 했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런 가벼움에 저항의 희화화가 삽입되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문을 가하던 이에게 취조 받는 학생이 동정을 하게 된다는 흐름은 가해자의 책임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감독의 취지와 상관없이 결코 연출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죄를 해야 할 것은 학생이 아니라 수사관이다. 감독이 말하려 했던 내용이 '비정규직은 부당하다'(이 부분에 대해서도 영상 안에서는 부당하다 보다는 '불쌍하다'였다.

인권은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영상은 대체로 고문하는 수사관을 가족도 못 챙기며 고생이 많은 가부장으로 묘사했고, 덩달아 가해자로서의 책임도 방면했다. 이런 방식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이 떠오르게 한다. 개인은 구조 속에만 위치하는가? 정녕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시도를 하지 말고, 그 구조를 겨냥하는 기획을 해야 한다. 덧붙여 구조를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면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적합한 분석을 통해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앞머리만 싹둑 잘라서 쓰지 말란 말이다.

마지막 작품은 <종로, 겨울>,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 역시 자신의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사회에 설자리가 없는 부류다. 분명 누구나 국적에 상관없이 자신의 노동권, 시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영상은 특별히 중국‘동포’를 선택했다. 영화의 내용만으로는 그것이 정당하다 해도, 그 영화가 외부와 결합했을 때에는 살펴야 할 지점이 더 생긴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민이 1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 속에서도 ‘핏줄’을 가려가며 접근을 하는 것은 오히려 편협한 시선 만큼 문제가 오롯이 비춰지기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이주민을 한데 묶어 그것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집단, 개인들의 차이를 지우자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중국동포, 조선족들이 다른 이주민들과 달리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상황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 시선에서 바라볼 때는 같은 민족으로 포함되지 못하는 서러움으로 비친다. 민족을 물질적 힘을 갖지 않은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하기에는 이 사회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가진 영향력이 너무 크다. 그 힘 때문에 중국동포, 조선족이 겪는 고유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일테지만, 왜 '민족'이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제기를 바란다면 너무 멀리나간걸까.

그럼 난 ‘여섯 개의 시선’을 볼 때랑은 뭐가 달라졌는데?

‘여섯 개의 시선’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인권’을 구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기던 그 때의 내 경험과 세계관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2003년까지 내가 ‘인권영화’라고 알고 있던 작품들은 대부분 항상 첨예한 갈등이 존재하는 곳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었고 그곳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이 존재했다. 그래서 ‘여섯 개의 시선’이 일상적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탐탁지 않았고 부족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좀 달라진거다. 갈수록 일상의 모든 영역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에서 저항은 시작될 수 있다고,(시작되어야 한다고.) 차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일상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고, 그런 제기들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느꼈던 변화는, 각각의 영상에서 제기되는 이야기들을 최대한 그 영상에 등장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사고하려 노력했고, 그 개인이 겪는 문제들에 그 자체로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들을 특수한 사례 정도(단지 이 문제만 있다는 식, 이 문제만 어쩌다 하나 빠트렸다는 식)로 다루면서 ‘인권영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용납할 수 없다. 이 영화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은 그것이 집단이 겪는 이야기든, 어떤 특정한 개인이 겪는 이야기든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적어도 ‘인권영화’라는 단어가 가져온 사회적 의미를 충족시키려면, 이사회가 어쩌다 빠트린 사례 정도로 이야기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겪지 는 않는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현실일 때, 그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큰 틀에서 ‘다섯 개의 시선’이 전작이 가진 시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을 지원한 기관이 같은 곳이고, 그렇다면 두 영화를 기획하며 감독들에게 요구한 수준도 비슷했을 테니 말이다.

이 영화들을 기획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가 ‘인권’을 보장하겠다며 만든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사회의 통념은 더욱 ‘인권’이 이미 보장되거나 곧 보장될 수 있는 것으로 확산되어 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존재목적 상 인권에 새로운 정의를 발견하기보다 기존의 정의에 현실을 끌어 맞추는 일을 주되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만큼 국가기구에 포섭된 ‘인권’이란 이미 사회적으로 갖추어진 인권의식 만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국가라는 권력을 통해 통용된 정의만큼도 지켜지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해결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또 한편 정말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국가인원위원회’ 같은 기구도 있는데 이제 너희들의 싸움을 그만두라고. 저항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온'이 그랬던 처럼 이 시스템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포섭되어가는 현실.

‘인권영화’가 이런 식으로 포섭되어 가는 게 아닌지, 그래서 이제 ‘인권영화’를 따뜻한 방에서 포근하게 누워 감상하며 ‘난 이 사회의 어두운 일면에도 관심 가졌어’ 라고 손쉽게 자신의 도덕적 감성을 충족시키게 만드는 건 아닌지, 그래서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건 아닌지, 저항도 소비의 아이템이 되어버린 지금 시대를 떠올리면 이런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이 글은 원광대학교 사회과학 동아리 소식지에 게재된 영화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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