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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내가 어렸을 적에 봄에는 산딸기와 찔레순을 따먹고, 아궁이에 불을 넣어 밥을 짓고, 가을에 나무를 하러 다니고, 동네 산의 비탈진 흙더미에서 미끄럼을 타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봄이 되면 온 식구가 밭으로 출동해 밭일을 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면 “자연에서 해맑게 자랐구나.”고 말하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진짜로 그렇게 자란 걸로 생각하기도 했다.

밭에서 딴 고추자루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루가 너무 무거워 내 목이 어깨 속으로 쏙 들어가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고, 조그만 방에서 여럿이 싸우고 부대끼며 생활하던 그때는 그것이 행복하다거나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원주민들의 삶을 드러내기

얼마 전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만화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원주민에는 나의 어렸을 적 이야기가 놀랍게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들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초등학교 때 신던 고무신이나 겨울 난방을 위해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던 이야기,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으로 떠나던 언니들, 마을에 한두 집은 꼭 있기 마련이던 주정뱅이, 꽃상여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인을 보내던 장례식 등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이런 모습들은 몇 해 사이에 순식간에 사라진 것들이기도 하다.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를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했다.

최규석 씨처럼 내가 “자연에서 해맑게 자랐구나.”하는 듣기 낯설었던 이야기에 외로움을 느껴 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원주민으로서 나나 나의 가족, 친구들이 살았던 시간들이 멀어지고 사라지고 나조차 낯설어지는 그것들을 작가 씨는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듯했고,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것들이 슬프게 읽히기도 했다.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보지 않는, 사라지는 원주민들

맞장구를 치면서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뒷장에서 지금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러다 조용히 사라지는 고달픈 삶을 살아내고 있는 대한민국 원주민의 모습들이 이어져 읽혔다. 최규석 씨가 이야기하는 원주민은 아닐지 몰라도 내 눈앞에 펼쳐지는 대한민국 원주민들은 지금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보지 않는, 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부푼 가슴으로 입사해 열심히 일한 대가로 병을 얻은 삼성의 산재노동자들이나, 쉴 곳이나 밥 먹을 자리마저 없는 일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같은. 해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이들은 삼성의 그 공장에 입사를 할 것이고,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지만 노동조건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원주민이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원주민」에 그대로 담겨 있는 나의 어렸을 적 대한민국 원주민들의 삶을 드러내기은 보이지 않은 채 살아가다 사라지는 무수한 삶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고, 나 또한 거기 어딘가에 끼워져 있을 것인데 이것들을 종종 모른 척, 못 본 척, 아프지 않고 니나노~ 살고 싶다고 발 하나를 둥실 띄우려고 하는 나를 확~ 잡아채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인정하고 있는 중이고, 「대한민국 원주민」에 그대로 담겨 있는 나의 어렸을 적 대한민국 원주민들의 삶을 드러내기은 강추~!

[글쓴이 덧붙임]이 글은 <평화와 인권>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덧붙임]오이님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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