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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백반 전문, 왕대포 집 "일성집" 문 닫다~

유기만( 1) 2010.01.09 09:47 추천:7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작은 막걸리집 '일성집'이 눈 내리던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을 닫았습니다.

점심때는 주변 직장인들이 매식을 하고 저녁이면 막걸리를 팔던 테이블 7개의 작은 가게였습니다. 문을 닫고 싶어서 닫는 것은 아닙니다.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어 새로운 주인에게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문을 닫은 것입니다.

상가임대차 보호법에 의한 보상금 750만원과 이사비용 100만원이 보상의 전부입니다.

나머지 보증금도, 권리금도, 건물수리비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월세를 내지 않고 몇 달을 버티며 손해를 만회하려 노력했으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몇개월 전부더 나가라던 주인의 성화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데모 전문가 큰 아들도 무용지물입니다. 주변 다른 상가로 가게를 이전할까 알아봤으나 보증금과 권리금이 만만치 않습니다.


경매로 넘어간 가게, 일부 보상만 받고 쫓겨나

어머니가 식당을 시작한 것이 벌써 7년 전입니다. IMF 당시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구조조정을 당했습니다. 기아 계열사의 주식을 몽땅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주가 폭락으로 퇴직금은 고사하고 큰 빛을 지고 정리해고를 당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처음 주식을 시작한 것은 내가 어릴적 포항제철이 처음으로 국민주를 발행하면서부터입니다. 국가에서 주식을 독려하던 시기에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도 주식을 사게 되었고 아버지에게 주식은 투기라기 보다는 보장성이 좋은 신기한 예금처럼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었고 집안은 하루 아침에 어려워졌습니다. 당시 나와 여동생은 대학엘 다니고 있었으며 남동생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식당엘 다니시다가 그것으로는 빛 갚기도 급급해 고모의 도움으로 작은 식당을 연 것입니다.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은 IMF 이후 생활 방식을 바꿔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가게일을 도우며 격일 경비 일을 하셨습니다. 물은 약수물을 떠다 먹었고 휴지는 아버지가 몰래 가져온 휴지를 썼습니다. 가게에 작은 방을 들여 아예 생활을 가게에서 하시며 생활비를 줄였습니다.

경비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60세가 넘어서 지역노조에 가입하였고 1년이라도 더 다니기 위해 안간힘을 셨습니다. 노조에서 정년이 만63세로 되었다고 하여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잘릴것 같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단체협약에 보니 정년을 만63세로하되 63세가 되는 사람은 그해 2월에 적용된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노조 말만 믿고 1년 더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황당해 하며 정년 년장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해 몇몇 분과 함께 잘리고 말았습니다.


IMF 이후 세 번 구조조정 속에서도 언제나 길을 찾았던 부모님

식당까지 합하면 아버지는 IMF 이후 세번의 구조조정을 당하셨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영세자영업자로, 영세자영업자에서 늙은 실업자로 말입니다.

천성이 낙천적인 부모님 덕에 저도 그런 천성이 있는 것 같아 항상 감사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길을 찾으시는 부모님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합니다.

부모님은 그간 고마웠던 분들을 모시고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일성집 문을 닫은 것을 못내 아쉬워 하십니다.

텃밭에서 농사짓던 농산물을 가져다 주던 전주 효자타운과 군산 평화 바람 식구들, *** 식품 제고를 가져다 주던 태식이 형 그리고 촛불과 함께 일성집에 들러준 많은 분들에게 부모님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기사로 써도 될까? 고민되었습니다. 너무나 사적인것이 아닌지 걱정이됩니다.

그래도 한번쯤 아버지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서민적인 너무나 서민적인 부모님 이야기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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