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뉴스

문화 생명을 마주하는 교실

채민( 1) 2010.04.24 10:39 추천:2

예전에 초등학교나 국민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몇 가지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학교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박스에 넣고 팔고 있던 병아리에 대한 추억이다. 병아리를 데려갔던 아이도 있었고 삐악거리며 울던 병아리를 쭈그리고 앉아 보며 마냥 신기해하던 아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노란털이 보송보송하던 병아리를 한참 보다가 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병아리를 데려갔던 친구는 별로 없었던 거 같다. 키울 장소도 마땅치 않은데다 부모에게 혼날 거 같아서, 또는 돈이 없어서 선뜻 병아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그래서 병아리를 데려간 친구들이 있으면 항상 하던 이야기가 병아리의 근황이었다. 대개 열에 여덟 정도는 며칠 키우다가 죽었다고 했다. 꽤 잘 자라서 어른들이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거 같다.

움직이는 생명에 신기해하고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던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 새끼돼지를 키웠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영화 ‘P짱은 내 친구(School Days with a Pig, 2008)’는 19년 전 일본의 한 초등학교 학급이 돼지를 키우면서 겪었던 일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사 호시는 자신이 담임을 하고 있는 6학년 2반에 새끼 돼지를 데려온다. 아이들은 새끼 돼지를 보며 신기해한다.

그런데 이 선생님, 학생들에게 새끼돼지를 ‘여러분이랑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데려왔다’고 말한다. 그것도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학생들은 술렁거리고 교장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호시 선생은 학생과 동료 교사들에게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먹기 위해 직접 하나의 생명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을 먹는 다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껴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걱정과 우려 속에 교장의 허락을 맡은 아이들은 재밌겠다면서 환호성을 지르며 새끼 돼지를 기르게 된다.

먼저 아이들은 학교 안에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대번에 새끼돼지에게 ‘P짱’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영화제목에 들어있는 P짱이 바로 주인공 돼지의 이름이다. 호시 선생은 좀 곤혹스러워한다.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이름을 붙여주기에 좀 꺼려졌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하는 일을 말리지 않는다. 돼지를 키우는 과정을 지켜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아이들을 가르친다.

▲영화 속 한 장면

P짱은 학교에 들어온 것도 쉽지 않았지만 커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울타리를 뛰쳐나와 학교 토마토 화분을 깨뜨리고 토마토를 먹는 등 말썽도 많이 부린다. 또한 아이들의 위험을 걱정한 학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호시 선생과 아이들의 노력과 이를 지지하는 교장 선생님 덕분에 위기를 면하게 된다.

아이들은 P짱을 돌보기 위해 당번을 정하고 정성을 다한다.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처럼 축구를 하고 불꽃놀이도 같이 하면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간다. 어느새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새끼돼지였던 P짱은 몰라보게 커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P짱을 돌보던 아이들 옆으로 지나가던 선생이 P짱을 보며 한마디 한다. “맛있어 보이게 잘 컸네.” 아이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지고 급기야 학교 급식에 고기반찬이 나와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호시 선생은 졸업까지 5개월 정도 남아 있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토론을 제시한다. 토론 주제는 ‘P짱을 잡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다. 누가 옳고 틀리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토론은 시작된다. 애완동물이니 먹고 싶지 않다, 먹는다는 조건으로 키웠으니 먹어야 한다, 잡아먹기 위해 키웠지만 반년동안 가족처럼 대해왔고 감정도 변화해왔으니 잡아먹으면 안된다 등의 의견이 나온다.

꽤 진지한 주장도 나온다. ‘P짱을 먹으면 P짱이 내 몸의 일부분이 되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먹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어라?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주장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자세는 진지하다.

서로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이어진다. 돼지는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P짱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선 ‘인간이 돼지를 잡아먹은 것은 인간이 정한 거고 돼지의 생각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맞받아친다. 여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데 P짱만 불쌍하고 다른 동물은 아무렇지 않게 먹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라는 재반론도 이어진다.

P짱을 먹을 것인지 여부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호시 선생은 P짱을 먹지 않는 대신 어떤 대안이 있을 것인가를 묻는다. 계속 학교에서 기르자는 의견이 나오자 ‘우리가 끝까지 P짱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면서 키운 건데 그걸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아니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런 주장들을 확인한 이후 첫 번째 토론은 결론없이 끝난다.

호시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P짱을 키울 수 없는지를 수소문하지만 이미 커버린 P짱을 맡아 줄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P짱을 먹지 말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첫 번째 토론 이후 ‘먹지 말고 계속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견과 ‘P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먹어야만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아이들은 분주해진다. 학급 게시판에 P짱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적어보고 집에서는 부모들과 이야기하고 투표를 하기도 한다. 투표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두 번째 토론도 한다.

아이들 모두가 차분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P짱을 두고 벌인 말다툼이 주먹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P짱을 무척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문제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졸업이 다가올수록 아이들과 호시의 고민은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이들과 호시 선생이 내린 결론은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다. 영화의 잔잔한 울림은 직접 느껴보시길 바란다.

영화의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6학년 2반 아이들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생명을 대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이다. 아이들은 열려진 자세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된다. 때로는 시간이 자신의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P짱을 마주하고 생명을 마주하는 진지한 고민의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아이들은 책임지려고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요즘 추진되고 있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생각이 났다. 혹자는 학생들이 인권만을 주장하며 책임은 지지 않게 되고 교육을 망치게 된다며 학생인권조례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역으로 인권의 주체, 교육의 주체로서 학생들이 책임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주어졌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다른 생명을 기른다는 경험이 없었던 영화 속의 아이들은 P짱을 기르면서 처음에 많은 실수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면서 P짱을 통해 생명을 마주하게 되며 진지한 자세로 책임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걸었던 것이 아니라 걸음마를 하며 넘어지고 엎어지는 일을 반복하여 비로소 걸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과 같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인권의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행사하면 많은 실수가 따르게 된다. 실수를 거울로 삼아 비로소 인권의 주인이 되고 타인의 인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P짱을 기르게 된 계기를 마련한 교사 호시의 모습도 교육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호시 선생은 아이들이 생명을 마주하는 과정을 안내하며 아이들의 결정과 과정을 존중한다. 그리고 교사로서, 6학년 2반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역시 26명의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P짱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다.

나는 호시 선생이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책임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마주하는 수업, 생명을 마주하는 교실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었다.

영화를 보던 시선을 현실로 돌려본다.

영화 속의 교실은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긴 우리의 현실은 P짱이 있는 교실과는 아찔할 만큼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전체 교사 수가 전체 법정교원수의 70%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 교사들은 밀려드는 업무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인다. 잠깐 틈을 내 아이들과 이야기조차 하기 힘들다. 한 교사의 말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자신이 담임을 하는 반 아이들도 만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수업 때 진도 나가기도 빡빡한데다 잠시라도 비는 시간엔 학교 잡무 처리하고, 다 끝나고 애들과 이야기 좀 해보려면 애들은 이미 학원으로 가있다는 것이다.

요즘 서울의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 중엔 학원을 5개나 다니는 학생도 있다하니 그럴 만도 하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호시 교사와 같은 모습은커녕 그 반대의 모습만 보게 된다. 기업에 가서 학생들을 취직시켜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어느 교장의 모습, 학생과 학부모들의 선택권을 존중한 교장을 징계하는 교육청 등을 보면 씁쓸함만이 느껴진다. 이 모두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정권과 그 정권의 눈치나 보는 부패하고 무능한 교육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교육 체계가 만들어낸 모습들이다.

영화의 말미에 졸업식에 참가한 아이들의 얼굴들에 담겨진 진지하지만 밝은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생명을 마주한 교실을 거친 아이들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 진지하고도 밝은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의 경쟁교육이 아닐 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덧붙임] 이 글은 격월간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74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임] 채민 님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상임활동가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