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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살림밑천 염소...죽다...

이민영( 1) 2002.12.24 20:36 추천:1

아침 소복이 눈쌓인 마당 한쪽 염소우리로 사용했던 헛간 앞에 짐승발자국이 너저분하다.

순간 '염소가 고삐 풀고 돌아다니나?' 하는 짧은 생각 후에 바로 내가 직접 확인했던 까만 덩어리가 눈앞에 떠오른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동네에 주인 없는 염소가 마을 밭을 망쳐놓는다고 설치했던 올무에 걸려든 그놈이 동네 어른의 인심으로 선물처럼 받아 키웠던 우리 집 큰딸이었다.

살림밑천이라고 저놈 잘 키워 부자 되겠다고 들떠 내년부터는 내가 직접 먹이고 키워보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했었던 우리 집 큰딸.

포근한 날에는 신랑과 함께 염소를 메러 양지바른 풀밭을 찾아 가족 나들이 마냥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동네 뉘댁에 씨 좋은 수놈 있는지 알아보라고 설쳐대기까지 했는데 시집은 커녕 겨울도 못 넘기고 죽었다.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는 먹이를 줘도, 풀밭에 나가도 근처를 내주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하루 이틀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맨 먼저 맞아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양지바른 풀밭에 내놓았다 좀 늦게 내가 직접 데리러 나갔더니 멀리서 나를 보자 마자 벌떡 일어나 그놈이 먼저 집에 갈 차비를 하고 나보다 앞서 집을 찾아 들어 그날 저녁 신랑에게 염소자랑을 한참이나 늘어놨었다.

그 예쁘고 기특한 모습을 남겨둔 채 2박3일 집을 비우고 돌아오니 까만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날 밤 신랑은 말없이 독한 술을 마셨고 나는 아무 일 없는 척 재미없는 TV만 봤다.

그날 후로 나는 마당에 있는 변소에 가지 않는다. 염소우리로 함께 사용했던 탓에 볼일을 볼 때면 빤히 쳐다보던 그놈 눈이 밟혀서 가기 싫다.

아닌 줄 알면서도 일없이 열어본 변소 한쪽에 쌓여 있는 눈을 보고 저 바람 때문에 얼마나 추웠을지.... 진작에 따뜻한 잠자리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오늘 아침에는 그놈 줄려고 말려놓았던 과일 껍질을 두엄자리에 버렸다.

이렇게 우리 집 염소의 흔적은 하나씩 지워지겠지만 그 귀여운 울음소리와 맑은 눈은 내 마음에 계속 남아있을 것 같다. 다음에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 빚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우리 집 염소는 귀농 첫 번째 시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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