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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혹시 레고 머리를 아시나요?

여은정( 1) 2002.12.07 20:42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아버지는 나를 보고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하신다.

아기가 어찌나 크고 뽀얗던지 아들로 착각을 하셨단다.

스물아홉 그 당시로서는 정말 노총각인 아버지가 스물 두 살의 엄마와 중매쟁이의 소개로 만나 낳은 첫딸은 처음이라 면소재지의 왕진의사를 불러 비싼 돈을 주고 받았다 한다.

그러나 둘째인 나는 물 설고 낯 설은 동네로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이웃들에게 부탁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직접 첫 딸을 낳을 때 의사가 했던 행위들을 떠올리며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밑으로 세 동생이 태어날 때 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엄마가 아이 낳는 것을 거들었다고 하신다.

요새 말하는 부모가 함께 아이를 낳는 운동이 따로 필요 없이 엄마와 아빠의 공동작업으로 우리들은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가끔 어릴 때 아버지는 “내가 느그들 배꼽을 잘 잘라서 배꼽이 그렇게 예쁜 거” 라며 자랑스레 말씀하시곤 했다.

어릴 때를 추억하며 우리 자매들이 가장 많이 웃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버지의 유별난 취미(?) 때문에 우리들의 머리가 모두 레고 장난감 -레고 장난감 인형들의 반듯한 앞머리와 반듯한 뒷머리를 상상하시라-같던 기억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대 때 배운 이발 기술로 다섯 명의 자식들을 한 명씩 불러 가면서 머리를 깍아 주는 걸 좋아 하셨다. 그것도 개성 없이 그냥 다 커트로...어릴 때는 아무 생각없이 머리를 대주었지만 사춘기가 되고 부터는 솔직히 아버지한테 머리를 깍기는 것이 정말 불만이었다.

그래서 좀 더 머리를 늦게 깍기 위해서 온갖 잔꾀를 부리기고 하고 어쩔 수 없이 머리가 눈에 닿는 다는 이유만으로 머리를 깍인 날이면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방에 들어가 거울을 보며 속상해서 울던 적도 있었다.

“나도 이젠 머리를 기르고 싶어요.” 그 말을 하고 난 뒤 아버지한테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의 당당한 첫 인간됨의 선언이었다.

아마 그것이 아버지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나와 우리 자매들의 첫 선언이자 분열의 시작이었으리라고 기억된다.

그 뒤 우리가 자라는 속도만큼 아버지는 늙어 갔고 머리를 깍아주는 대신 가끔 외출하는 나를 붙들고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라고 충고하시거나 직접 빗어서 묶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언니는 손 끝이 아주 야무져서 내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후로 내 머리를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꾸미곤 해서 주위 사람들의 감탄을 받아내곤 했다. 그런데 그런 언니와 아빠를 둔 덕분에 나는 내 머리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머리 빗는 걸 항상 잊어 버리기 때문에 부스스한 데다가 아무리 내가 머리를 깔끔하게 한대도 어딘지 어수선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이상형은 우리 아버지처럼 머리 스타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아 머리를 잘 손질해 줄 수 있는 사람이던가 아예 내 머리가 어떻든 전혀 상관을 안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 독립된 개체로서의 말 안 듣는 자식인 나는 오늘도 아버지와 전쟁을 한다.

지난 97년 대선 때 대중이 선생님 안 찍고 딴 짓 한다고 엄마랑 둘이서만 차 타고 투표하러 가시더니 흠 요번에도 그러시면 “정말 미워요, 아버지, 그래도 같이는 가야죠. 그 먼거리를 어떻게 가라고? 그리고 TV 보다가 서로 의견이 달라도 삐져서 그냥 시골집으로 가시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한테 조근 조근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저 정치꾼들 땜에 우리 부녀지간이 의가 상해서 되겠어요.” 아버지께 드리는 둘째 딸 나의 음성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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