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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교육 묻혀지는 죽음들..

강문식( 1) 2002.12.11 21:20

며칠 전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입시공부가 두렵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 며칠 전에는 대학 입시에 탈락한 한 재수생이 목을 매 숨졌다. 또 그 며칠 전에는 한 고등학생이 학업성적을 고민하다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게 훨씬 많고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이들의 죽음을 그들 개인의 심성 문제로 돌리고 있고, 학교에서 '인간의 존엄성 교육'등을 더 철저히 하면 해결될거라고 믿는 한심한 선생 나으리들의 가르침 속에 그들의 죽음은 쉽게 묻히고 만다.

학벌은 구조적 문제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이 '학벌'이라는 기묘한 구조로 옭아매어져 있는 현실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능을 통한 획일적인 줄세우기를 벗어나고서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란 거의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이들을 죽인 것은 획일적인 줄세우기를 강요한 사회 구조적 모순이다. 조기 교육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거기에 따라가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것처럼 부추겼던건 이 나라 정권과 언론들이었고, 해마다 수능시험이 다가오면 그 시험만이 사람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인 마냥 선전하는 것도 이 나라 정권과 언론들이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그 학벌 구조 사회 안에 편입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학력은 무엇인가

나는 이른바 '이해찬 세대'로 지목받으며 세간의 뜨거운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요새도 이름이 비슷한 이모씨는 자신의 선전에 '이해찬 세대'를 이용하고 있다. 대체 그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토록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는지 속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학력이 무엇이길래 몇몇 사람의 정책에 따라 땅바닥으로 곤두박칠 치기도 하고 평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느냐 말이다.

학력을 쉽게 이야기 하면 말 그대로 공부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학력저하는 '수능점수하락'을 가르킨다. 지금껏 언론들은 수능점수=학력 이라는 공식을 불변의 진리인양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근거가 있다면 근거를 대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 수능에 출제된 문제를 예를 들겠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시인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이다. 시험문제는 김소월, 백석, 정지용, 김용삼, 이성부 이들 다섯명 시인의 시에서 적당한 구절을 뽑아놓고, 밑줄 친 부분과 가장 비슷한 정조를 찾으라는 것이다. 답은 ④번.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김용삼 시인의 묵화에 나온 구절이었다.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걸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몰상식이다. 대체 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정체 속에서 어찌 그토록 간단하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다섯개 중에 반드시 하나를 찍어야만 하는 시험을 통해 시를 파악하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발상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은가. 이런 것이 정말 공부하는 능력인가?

학력이란 개념은 허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땅안에 수백만의 학생을 옭매기 위한 수천만의 학부모를 옭매기 위한 누군가의 조작극이다. 변별력 있게 어려운 수능을 출제하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좀더 점수 차이를 많이 벌려서 일류대 진학할 사람과 이류대 진학할 사람의 차이를 확실하게 해놓아 자신의 성을 견고히 지키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지금 학력의 기능은 이것이다. 공부하는 능력이 아닌, 학벌구조아래에서 계급을 결정하는 잣대일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벌로 인해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의 침묵에 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묵인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학벌로 인해 수혜를 받는 것을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도 아주 닫혀 있지 않은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 아닌가. 잘못된 구조를 만들어 내는 환상은 당장 깨야 한다. 사람의 노력이 성적이라는 잣대를 통해 획일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인위적인 조작이다. 누구를 이롭게 하는 조작극인지 부연이 필요한가.

내가 겪은 이야기들이 분명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받아 안아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학벌이라는 문제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쉽게 느끼기 어려운 곳에까지 스며있다. 단순히 학벌타파를 외치는 구호만으로 일상적인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여러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런 논의가
사회적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언젠가는 학벌이라는 지긋지긋한 망령을 구시대의 유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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