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뉴스

김종필이 43년간의 정치할동을 접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묘하게도 은퇴선언일은 4월 19일. 4.19 혁명을 군홧발로 짓밟은 5.16 군사구테타로 정계에 입문한 그가 은퇴한 날 치고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김종필은 이번 17대총선에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 등록하였으나 자민련이 2.8%밖에 득표하지 못해 낙선하였다. 같은 시간 낙선되는 줄 알았다가 자민련이 3% 벽을 못넘는 것이 확실해지고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13%는 넘기면서 당선으로 돌아선 노회찬. 이 두 정치인은 지역주의와 구시대 정치의 상징적 인물과 새로운 진보정치의 대명사로서 이번 17대총선 결과 운명이 갈렸고 17대총선을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김종필은 왜 자신의 자리에 노회찬을 밀어주었나?
- 두번째 이야기, 김종필 vs 노회찬


김종필의 정치역정 - 충청지역주의가 생성되어 소멸되기까지

김종필은 19일 김학원 원내총무 등 17대 당선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패전의 장수가 무슨 말이 있겠냐"며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면서 "43년간 정계에 몸 담으면서 나름대로 죄가 됐다. 여러분들이 지혜를 모아 당을 수습해 주기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김종필은 35세의 나이로 5.16구테타당시 사실상 권력서열 2위로서 새로운 형태의 정당(민주공화당)과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주역이었다. 40대초반이던 70년대초에 이미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1991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연합과 신한국당 창당, 그리고 90년대중반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한 뒤 당시 신한국당의 실력자 김윤환씨의 '충청도 핫바지론'이 나오면서 자민련을 만들고, 1997년에는 충청도 캐스팅보드를 절묘하게 활용한 DJP연합으로 다시 정치중심으로 등장하였다. 노회한 김종필은 16대국회에서도 충청지역 주민들의 지역감정을 동원하였고 후반부에는 숫자가 많이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탄핵국면에서도 탄핵을 가결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고, 17대국회에서는 비례대표 1번으로 ‘10선의 위업’을 달성하려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충청지역의 ‘지역주의’는 본래 생성근거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충청지역 지역주의를 일컬어 영남지역주의와 호남지역주의의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 ‘파생적 지역주의’라고도 부른다. 김종필과 충청 지역주의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은 충청 지역주의는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발판삼아 정치 생명을 유지하려는 노회한 정객의 정략과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이해 타산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기반이 약했던 것인가? 여하튼 충청도 지역주의는 17대총선에서 사실상 몰락하였다. 충청도 내부에서 지역구 4석이외에는 아무런 성과를 남기지 못한 결과 보기드물게 극우 이데올로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칭 ‘정통보수정당’ 자민련은 사라져가고 있다.

비밀은 있다. 호남지역주의는 ‘보수적인 지역주의’로 최근 몇 년 사이에 변형되었으나 1992년 3당합당에 김종필이 참여하던 시절부터 충청지역 지역주의는 사실상 ‘보수적인 지역주의’로 등장했고, 1995년 창당한 자민련을 매개로 이미 ‘보수적인 지역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였고 1997년에는 DJP연합을 통하여 충청지역주의를 ‘보수적인 지역주의’로 굳혔다. 그러므로,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이 ‘충청지역 신행정수도’를 공약하였을 때 충청지역주의는 자신의 대리인으로 노무현후보를 선택(2002년 대선 47.6%)하게끔 되어있었고 2004년 17대총선에서는 압도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게끔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대 자민련의 지지비율이 충남은 38% : 23%, 대전은 43% : 14%, 충북은 44% : 6.3%인데 이는 ‘신행정수도’라는 지역발전에 대한 관심도가 정당지지를 결정하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적 개발논리가 충청지역주의를 흡수한 결과 자민련에 대한 충청지역의 지지는 거두어지고 대신 그 자리를 열린우리당이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자민련은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 제도가 광역단위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전국단위 비례대표인 이상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김종필이 10선을 하기 위해서는 비례대표 1번이 아니라 직접 지역구중 하나를 꿰어찼어야했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은 게임이기는 하였겠지만 말이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죽었어도 여러번 죽었을 김종필이 부활을 거듭하여 9선을 하는 동안 열린우리당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충청지역 주민들의 정치의식은 권력을 장악한 정부여당의 신자유주의 논리를 수용할 수 있게 매우 쉽게 훈육되었다.


김종필이 낙선하면서 밀어준(?) 노회찬

반면 4월 15일 16대총선이 끝나고, 다시 자정이 지나고 16일 새벽이 되면서 김종필이 비례대표에서 미끌어지는 순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으로 노회찬이 당선된 것은 극적으로 이번 총선이 어떤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속의 주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좀더 또렷하게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대부분이 알게되는 경우가 많지만 바로 그 당시의 역사를 정확히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다. 노회찬은 13%를 넘어서는 전국 득표로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순번으로 당선되어 17대국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낡은 지역주의의 운명과 지역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타도 유인물제작 살포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시작하고 1982년부터는 노동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87년 민중항쟁의 와중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창립하고, 1989년에는 인민노련의 격주간 기관지 <사회주의자>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다시 석방되어 1993년에서 98년까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를 역임하였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노동일간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이 되었다. 1997년 국민승리21의 기획위원장과 정책기획홍보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 부대표가 되었고, 2002년부터는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되어 2004년 총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경력에서 보듯이 노회찬은 70년대 유신반대투쟁에서부터 8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 90년대 진보정치운동과 민주노동당이라는 대중적 진보정당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사와 사회운동을 핵심부에서 관통해온 인물이다. 노회찬의 당선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성장과 권력의 중심에서 거의 비껴난 적이 없는 김종필에 비교하면 거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노회찬을 김종필은 자신을 버려서 밀어올려(?) 주다니? 극우파 노정치인 김종필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김종필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났다’고 떠벌이는 박정희와 골프를 치면서 만든 극우적인 유신파시즘체제의 주역이 되었으나 이후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전두환 시절에는 외방에 밀려나 있었으며, 1987년이후 정계에 복귀한 다음부터는 양김에 눌려있다가 한때는 YS와 연합하고, 한때는 DJ와 연합하는 방식으로 생존하였고, 결국 DJP연합과정에서 필생의 소원인 내각제합의를 이루어놓고도 김대중이 막판에 합의이행을 거부하자 결국 무릎을 꿇었으므로 평생 ‘2인자’를 못 넘어섰다. 이후에는 자민련을 붙들고 다시한번 ‘중흥’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2004년 17총선에서 은퇴하는 운명을 맞았다. 김종필은 대략 극우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정강정책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다. 아직 어설프기는 하지만 한나라당의 영남지역주의와 융합한 극우이데올로기를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가 옛 사회주의자 노회찬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는 사고를 쳤다.


지역주의를 대체하는 정치이데올로기들이 성장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변동된다. 지역주의는 사라지는 것일까? 사라지는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소멸한다. 이때 소멸한다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체제로서의 한국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 질서에서 지역주의가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는 극우이데올로기의 보조자로 위상을 전화한다. 지역주의는 진보정당 민주노동당과 노회찬에게는 아예 그 싹이 없는가? 1차적으로는 당연히 없다. 계급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에는 지역주의가 자리를 잡기가 힘들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당선자 10여명의 대부분이 영남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지역주의라고는 하기 어려워도 지역주의의 토양은 어떤 조직에든 존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소멸되려면 다른 이데올로기가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이데올로기는 탄압을 받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이데올로기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대체이데올로기가 등장해야 비로소 소멸된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부르조아정치질서를 재생산하는데 강력한 역할을 해온 지역주의는 김종필의 퇴장에서 보이듯이 황혼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지역주의는 대체이데올로기가 아직 미약하여 호남과 충청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개발논리의 보조축으로 변형되어 보존되고, 영남에서는 극우이데올로기와 접합되면서 유지되었다. 대체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을 위치지운 열린우리당의 ‘전국정당을 매개로 하는’ ‘신자유주의개혁이데올로기’가 지역주의를 본질적으로 청산하기 어렵다는 것을 충청과 호남의 지역주의가 보여준다. 물론 영남의 지역주의는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지역주의 청산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반면에 민주노동당의 13% 득표와 노회찬의 등장은 지역주의를 대체하는 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세력의 등장 가능성을 보여둔다. 동시에, 한나라당의 아직 어설프기는 하지만 극우파이데올로기를 담아내고자하는 노력이 강남의 강력한 지지와 영남주민의 지지를 끌어낸 것은 지역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이념지형을 예고하는 것이다.

어쩌면 김종필은 불운한 정치인일수도 있다. 극우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있었지만 군사정권의 역사가 지속되고, 지역주의가 창궐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지도 못했고(?), 이제 10선고지를 눈앞에 두고(?) 정치활동을 마감해야하는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너무나 뒤늦게 지역주의의 말을 탔고, 또 어쩌면 너무나 빨리 극우이념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역사란 항상 시간과의 싸움이며 김종필은 그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이제 민주노동당과 노회찬에게 놓인 시간은 김종필이 시대착오적으로 유지하려했던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사회구성의 이념과 정책전망을 세우는 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김종필이 못다한 과업인 극우이념의 전국적 실현을 지역주의를 확실하게 넘어서는 새로운 한나라당이 등장흐는 것으로 목격하게 될 것인가? 장기적으로 제도권정치의 미래는 노회찬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세력과 박근혜로 대표되는 탈바꿈한 옛 정치세력이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빨리 명료하게 형성하면서 힘을 만들어가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종필은 사라졌고 노회찬은 등장했다. 한국사회 민주주의는 요동치고 있다. 만약 확고한 지역주의 청산 이데올로기와 그 주체세력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열린우리당의 어설픈 지역주의 청산작업은 지역주의를 다른 방식으로 남겨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을 깔아놓을지도 모른다. 김종필은 말했다. ‘노병은 죽지 않았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지역주의의 노병은 죽지않았다. 다만 숨었을 뿐이다.’ 지역주의를 청산하는 작업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력화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총선결과, 생각가는대로 썰풀기는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 박근혜 vs 추미애
두 번째 이야기 노회찬 vs 김종필
세 번째 이야기 이남순 vs 단병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