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뉴스

한줄뉴스 2002 한·일 노동자 교류를 다녀와서

편집팀( svmanz@hanmail.net) 2002.10.16 11:42

[편집자 주]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10여년전 아세와스와티 투쟁에 일본 노동자들이 연대했던 경험을 기념하며 해마다 노동자방문교류행사를 갖고 있다. 올해 일본방문에 함께 했던 군산노동자의 집 한 활동가의 방문기를 여기에 싣는다.

일본 노동운동의 현장을 보고 오다.

지난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6박 7일 동안 노동안전을 주제로 지역의 노동안전 담당자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 다녀왔다. 올해로 벌써 10년을 넘긴 한·일 노동자 교류는 지난해부터 구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는데 작년에는 비정규직, 올해는 산업안전을 주제로 교류를 가졌다.

매번 일본 노동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며 환영회를 갖기는 했지만 사실 어떤 것도 내 문제로 다가오거나 절실하게 국제 연대의 필요성이 느껴지지는 않았던 나였기에 이번 일본 방문을 통해 받은 감동은 참으로 크다.

먼저, 내가 일본에서 받은 첫 인상은 오사카라고 하는 도시가 참으로 아기자기 하다는 점이다. 첫날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전항만 노조가 있는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본 일본 거리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 70년대의 뒷골목 같은 느낌의 낡고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영화 세트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아주 깨끗해서 어느 곳에서도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 따윈 볼 수 없었고 저녁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사람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안내자인 시호자키씨 말로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 공장 근처라 사람들이 퇴근해서 밤 시간에는 그렇게 한적하다고 한다.
머무는 동안 우리는 전항만 노조, 사회보험, 의료보험 노조, 관서 레미콘 노조, 코뮤니티 유니온과 고려노련을 방문하여 그들과 교류를 가졌다.

교류를 통해 기본적으로 알게 된 것은 한국의 노동법 및 노동탄압의 수단들이 대부분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껴 온다는 사실과 한국과 일본의 노동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이 우리 보다 10년 내지는 20년쯤 노동탄압의 흐름이 앞서 가고 있어 현재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손해배상청구제도는 이미 일반화 된지 오래고 최저임금 인상투쟁은 60-70년대 전평시대에 한참 투쟁하여 임금수준을 높혀 놨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최저임금제도는 유럽처럼 업종별, 지역별로 다른데 요사이엔 오히려 최저임금제도가 악용되어 고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라는 운동을 자본가들이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노동운동은 자본측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인하여 투쟁성을 잃은지 오래다. 그리하여 그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배워야 할 점으로 꼽는 것이 전투성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대략 평균 나이가 40-50대로 이미 몇 십년 전에 투쟁을 경험한 세대로써 젊은이들이 조직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의 노동운동은 역동성이 있어 부럽고 내가 본 일본의 노동운동은 체계적이고 나이가 많아도 지치지 않는 그 운동성이 부럽다.

어디를 가나 노동자의 가장 큰 힘은 끈질김 그리고 연대 .

일본에 온지 나흘째인 27일 5년전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간 고베지역으로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는 고베지방법원에서 있을 행정소송 판결공판을 방청하려 하였으나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여러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과 교류회를 가졌다.

노조가입을 이유로 부당 해고된 꽃가게 점원이었던 여성노동자, 전해운협이라는 어용단체를 탈퇴하고 전항만 노조에 가입하였다 하여 고용승계에서 탈락된 항만 노동자 그리고 사회복지 시설인 고아원에서 일하다 해고되어 13년간 투쟁중인 여성 노동자의 사례발표가 있었다.

물론 어느 것 하나도 혼자 힘으로 싸우기는 힘들지만 특히 나는 13년이라는 세월동안 투쟁해온(초등학생이던 딸이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닌다던) 니시 나오코씨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 의지력과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지금도 그 기간동안 함께 해준 노조가 없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지도 모르지만 함께 해준 동지들이 있어 지금껏 투쟁할 수 있었노라며 환하게 웃음 짓던 여성노동자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역시나 우리 노동자의 가장 큰 무기는 자본가놈이 뭐라든 끝까지 투쟁하는 끈질김이고 또 하나는 연대라는 아주 멋진 투쟁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속의 한국인, 그들은 우리의 동포이자 동지이다

난 재일 동포를 영화 'GO'를 통해 본 것만큼만 알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차별 받고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요번 교류를 통해 일본내에서 재일교포로 산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고려노련은 이러한 재일동포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상담과 차별철폐를 위한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다행히 우리가 갔던 시기가 조선학교 운동회가 한창이었던 때라 잠시 운동회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조선학교에 들렀는데 그 때의 느낌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들이 우리 말로 ""하나 둘 마음을 맞추어"" 하나 둘 이라고 외치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펄럭이는 인공기 때문이었을까? 크게 울려퍼지는 휘파람 노랫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님 여성연맹의 부위원장이라며 내 손을 잡은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였을까?

스스로 반공이데올로기에 감염되지 않았노라고 여겼던 내게 조선학교 운동회의 모습과 인공기가 펄럭이는 광경은 일종의 무서움증을 나에게 불러 일으켰고 동시에 같은 말을 쓰는 동포,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로서 그들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환희로 인해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이것은 정말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의 신체적 반응이다)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뭔가 가슴이 뭉클해져서는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조선인 학교를 다니게 될 경우 경제적 부담 등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선인 학교 맞은 편에는 일본의 공립학교가 있었다. 그곳은 운동장도 엄청 넓고 시설부터가 달랐다. 아하...차별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내 눈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한·일 노동자 교류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노동자는 국적을 초월해서 모두가 노동자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초국적 자본을 가지고 움직이듯이 노동자 역시 초국적 단결을 통해 자본에게 대항 할 때만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평등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내셔널가의 노랫소리가 각국의 언어로 울려 퍼지는 그 날을 고대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구호를 하나 적는다.
""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해서,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
이 구호는 코뮤니티 유니온에서 선물 받은 잠바 뒤에 써있던 구호다.


-여은정(군산노동자의 집 활동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