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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전화나 이동전화에 가입할 때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게 청약서다. 이 청약서엔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다른 연락처, 요금 자동이체에 사용될 신용카드번호나 은행 계좌번호 등을 적게 돼 있다. 작성된 청약서는 지점이나 대리점 컴퓨터를 통해 통신업체 본사의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다.

문제는 가입자가 서비스 이용 계약을 해지해도 이 정보는 업체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감사원의 정통부 감사 때 이동전화 3사가 신상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해지 가입자 수만도 1700만명을 넘는다. 에스케이텔레콤의 경우 1988년 7월에 해지한 가입자 것까지 갖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사업을 정리한 무선호출(삐삐)과 발신전용휴대전화(시티폰) 업체들도 여전히 이 정보를 갖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케이티와 하나로통신 등 시내전화 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2500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소비자와 시민단체 사이에서 청약서를 파기하고,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돼 있는 정보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 이창범 팀장은 “이용계약을 해지했다면, 신상정보 보유에 대한 동의 의사도 철회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감사원도 정통부에 통보한 감사 결과에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과 개인정보보호지침을 들어 해지 가입자의 신상정보를 즉시 없앨 것을 촉구한 상태다. 법에 명시된 ‘개인정보 수집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이용자가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동의를 철회한 때’를 가리키며, 사업을 정리하거나 가입을 해지한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못박았다. 감사원은 다만 법에 따라 요금을 다 내지 않은 해지 가입자의 신상정보는 계속 보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사원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통부는 해지 가입자 신상정보 파기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정통부 유영환 정보보호심의관은 “상법에 ‘상업장부와 영업에 관한 중요서류는 10년 동안 보존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어, 무조건 파기하라고 할 수 없다”며 “상법이 상위법이라 어쩔 수 없다”고 못박았다. 통신서비스 사업자들이 해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갖고 있기만 하는 것인데, 왜 문제를 삼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업자들도 상법 조항을 들먹이며 해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를 계속 보유하겠다는 입장이다. 에스케이텔레콤 관계자는 “이동전화를 해지한 뒤 요금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동전화를 이용한 사실을 증명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업체는 해지 고객의 신상정보를 삭제했다는 점에서, 정통부와 사업자들의 주장은 맞지 않는다. 케이티는 시내전화 이용 계약을 해지하는 즉시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신상정보를 삭제한다고 밝혔다. 삐삐와 시티폰 사업자 중에서도 서울이동통신과 제주이동통신은 삭제했다. 상법에 보관하도록 돼 있다는 정통부 주장이 맞다면, 이들 업체는 법을 어긴 게 된다.

게다가 가입자 신상정보를 담고 있는 청약서 관리는 엉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부 삐삐와 시티폰 사업자들의 경우, 사업을 폐지하면서 청약서를 대리점에서 알아서 파기하도록 했지만, 실제로 파기했는지는 확인 불가능한 상태다. “청약서는 가입 1년 뒤 파기한다”고 밝힌 케이티도, 확인 결과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가 아무런 원칙없이 사업자들한테 맡겨져 있는 셈이다. 한 이동통신 회사 관계자는 “솔직히 분명한 지침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업체 관계자들은 이 정보를 신규가입자 유치 등 마케팅 활동에 활용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결국 해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가 언제든지 부당하게 이용되거나 유출될 수 있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동통신 업체 관계자는 “때로는 수사기관도 해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해지 가입자의 신상정보를 동의없이 계속 갖고 있는 것 자체가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판단 아래 현재 개인정보분쟁조정위에 피해보상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국회에서도 이번 국정감사 때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될 전망이어서, 한동안 해지가입자 신상정보 보유를 둘러싼 공방전이 가을 통신업계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한겨레 김재섭 정보통신전문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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