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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경제 “4월에 태어난 막내 아이, 고작 1주일 옆에서 보고 떠났습니다”

[유족 인터뷰] 한솔케미칼 백혈병 투병하다 눈 감은 청년 노동자 유족들

문주현( jbchamsori@gmail.com) 2016.08.22 16:32

지난 3일 새벽, 급성 백혈병으로 10개월 가까이 투병 중이던 청년 노동자 이 아무개씨가 결국 숨을 거뒀다. 전북 완주군 봉동공단의 화학공장 한솔케미칼에서 3년 가까이 일한 이씨는 3살 딸과 이제 100일을 갓 넘긴 아들,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관련 기사 - '백혈병 산재' 신청한 한솔케미칼 노동자 끝내 눈 감아>

그 꿈은 급성백혈병으로 깨졌다. 이씨는 백혈병의 원인은 회사에서 다뤘던 유해물질과 장시간 노동 때문이라며 민주노총 전북본부와 함께 지난 5월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산재 조사는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현장 조사를 비롯한 구체적인 역학조사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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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고인의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들을 만났다. 유족들은 이씨가 죽기 전, 산재 결과를 무척 기다렸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역학조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남편은 지난 3개월 동안 많이 기다렸어요. 몸이 좀 좋아져 말을 하게 되면 꼭 (산재에 대한) 말을 했죠. 아이들 때문이라도 꼭 산재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일한 것이 억울해서라도 꼭 받아야 한다고. 매일매일 아이들 이야기였고 걱정이었죠. 본인이 아픈 것은 100% 유해물질 노출 때문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결과가 안 나오니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고 본인이 직접 근로복지공단에 가봐야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이 아무개씨의 부인 A씨>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지난 6월 30일 역학조사 의뢰를 받았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구체적인 역학조사 계획을 말해줄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조사는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한솔케미칼에 2012년 1월 입사하여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난 10월 말일까지 약 3년을 근무했다. 이씨의 유족들은 장시간 노동에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한솔케미칼은 LCD 등 전자제품 생산공정에 필요한 전극보호제와 세정제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이다.

“백혈병 의심 소견서를 들고 갔는데 야근하고 가라고 했어요”

지난 5월 한솔케미칼은 이씨의 백혈병 발병에 대해 “회사 차원에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휴직하고 치료에 전념 중인 이씨의 회복과 복직을 위해 회사 차원에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한솔케미칼의 이 같은 반응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르다’고 봤다. 무엇보다 유족들이 분노한 것은 백혈병 검사를 위해 입원 수속을 밟은 지난해 11월 초, 입원 당일 새벽까지 야근을 했다는 사실이다.

사정은 이렇다. 10월 중순 이씨는 심한 기침 등 감기 기운에 몇 차례 병원을 다녔다. 감기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밤중에는 이불 두세 겹을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혈액 수치 검사 결과가 나왔다. 백혈구 수치가 6만을 넘어선다는 것. 정상 수치가 6천~1만이라는 점을 비춰볼 때 심각한 상황.

“혈액의 염증수치가 높다는 소견서를 받고 당장 큰 병원에 입원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어요. 사위는 소견서를 가지고 회사에 병가 신청을 하려고 했죠. 전화로 해도 될 것을 직접 찾아가서 말을 해야 한다기에 제가 짐을 싸서 같이 갔어요. 경비실에서 저의 출입은 막더군요. 사위가 자기가 말하고 오겠다고 해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가라고 그랬답니다. 결국 그날 야근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전주의 큰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혈액의 염증수치가 6만이던 것이 8만이 나왔습니다.”(고 이 아무개씨의 장인)

이씨의 장인의 말이 끝나자 부인 A씨가 “(회사 관리자가) 휴가 요청을 하면 대체가 없지 않느냐. 피곤하면 항생제 맞으면서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해요”고 덧붙였다.

이씨는 하루 기본 8시간 근무에 많게는 12시간까지 일을 했다. 월 잔업이 100시간을 넘어가기도 했다. 장모는 “회사가 돈도 좋지만 사람을 죽이려고 하냐”며 사위 걱정을 했다. 이씨는 지난 4월 28일 산재 신청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발표된 편지를 통해 “첫 아이가 태어난 무렵부터 제품의 출하량이 급격히 늘었고 거의 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했습니다. 하루 12시간 근무도 많았고,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2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적어도 자신이 다루는 물질이 어떤 물질인지 알고 있었다면, 회사가 안전에 더욱 신경을 썼다면 어땠을까? 이씨는 과연 감기와 장시간 노동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까?

A씨는 “근무시간에 교육이 있었다고는 해요. 그러나 일지에 사인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눈에 물질이 물로 씻고 안과 치료를 받았어요. 입사 전 1.2였던 시력이 0.5까지 떨어졌어요. 옆에서 보기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일을 했습니다.”고 말했다.

“백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산재 신청 하지 말라고 집까지 찾아왔어요”

유족들은 이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회사가 보인 태도에도 분노했다.

“(회사 관계자들이) 집까지 찾아왔어요. 산재 신청을 못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백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불안해했어요. 온 사람들이 다 윗사람들이잖아요. 당연히 부담스러워했죠. 가고 나면 손도 떨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고 이 아무개씨의 부인 A씨>

이씨의 죽음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점이었다. 이씨가 애타게 기다렸던 산재 결과는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전화 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기운이 없어 작은 목소리로 ‘엄마, 나야! 이제 산소호흡기 뺐어.’라고 말했어요. 제가 좋아지면 차 한 대 사줄테니까 가족들하고 여행도 하라고 했지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느리에게) 무슨 차 살지 생각하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고 이 아무개씨의 어머니>

이씨의 어머니 B씨는 간암을 앓고 있는 이씨의 아버지와 함께 광주광역시에 머물고 있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이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치료를 거부하고 이씨의 산재 신청 등을 도맡아 진행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씨의 아버지였다. A씨도 영상통화가 마지막이었다. “아이들 기 안 죽이게 잘 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평상시와 같았는데, 그때는 눈물을 흘렸어요.”

이씨의 장인은 “갓 태어난 아기 얼굴을 본 것이 고작 1주일입니다. 안아 볼 수도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한편, 한솔케미칼 관계자는 이씨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날, 야근을 한 것에 대해 “당시 관리자와 상호간에 이해하고 근무에 임한 것으로 확인했다”면서 “당시 고인은 야간 근무자였고 응급실 외에는 (문을 연 곳이) 없어 근무를 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또한, 유족과 이씨를 만나 산재 신청 중단을 종용했다는 것에 대해 “상호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것이 불편했는지 등을 확인하는 대화를 나눈 것”이라면서 “한솔케미칼은 이씨의 병 치료를 위한 의료비 전액을 다 지원하고 급여도 대부분 지원하여 생계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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