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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방 이석기 덧씌운 내란예비음모의 역사

천용길( icomn@icomn.net) 2013.08.29 10:48

28일 검찰과 국정원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게 적용한 혐의는 내란예비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알려졌다.

 

형법 제87조 내란죄는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을 목적으로 하여 폭동하는 죄’를 칭한다. 형법 제89조와 제90조에 따르면 내란에 대한 예비음모와 선동선전도 처벌하며, 예비음모는 실행에 이르기 전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한다고 했다.

 

국토의 참절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주권 행사를 배제하고 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국헌문란은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석기 의원이 불법적 권력을 행사하거나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또, 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려 한 행위는 무엇일까. 사실이 아니라면 왜 혐의를 씌운 것일까. 그것도 대선개입 문제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국정원이 나선 점은 여러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예비음모 혐의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다. 현역 국회의원에 내란예비음모를 적용한 것은 두 번째다. 내란죄가 적용된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김두한이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김두한은 1966년 1월 8일에 5단계 혁명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통과되었고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은 이후 5월 10일에 김두한을 비롯한 모두 전원 무죄선고 되었다.

 

내란죄를 적용한 대표적인 1980년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을 북한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518광주민중항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적용한 것이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 5.17조치와 함께 기소돼 계엄군법회의를 거쳐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후 서울고법은 2004년 1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심공판에서 김 전 대통령의 내란음모와 개헌법 위반공모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 있다. 1971년 중앙정보부는 김근태 전 민주당 고문, 전태일 열사 평전의 저자인 조용래 변호사 등에 대해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다”면서 구속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ㆍ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 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기능 정지 후 정부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공소사실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드러나 사회문제가 된 이 사건은 선고 공판에서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은 무죄로 선고됐다.

 

이석기 의원에게 적용된 또 하나의 혐의인 국가보안법 적용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번 압수수색이 이석기 의원을 포함한 통합진보당 당직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을 보면 유사한 사례로 조봉암을 포함한 ‘진보당 사건’을 꼽을 수 있다. 통합진보당의 약칭이 ‘진보당’인 것도 유사하다.

 

1956년 11월에 결성한 진보당이 북한의 간첩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며 1958년 1월에 당 간부 전원이 검거된 이 사건으로 조봉암은 사형당했고, 진보당은 해산됐다. 하지만 2007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의 처형을 정치탄압으로 규정했고,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열린 재심 재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렸다.

 

김두한은 내란음모사건으로 연루되기 전 한일협정 반대를 앞세워 당선됐다. 그해 1965년은 1964년부터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이어진 정국이었다.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이 일어난 1971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7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가까스로 선거에 이기고 3선에 성공한 해다. 이듬해인 1972년 유신을 단행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일어난 1980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의 정권장악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확산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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