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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을 하면 싸래기만 나온다. 소 여물로 줘야 한 판이다”

 

수확을 1달 앞둔 논을 갈아엎는 것을 지켜보는 농민이 한 숨을 쉬며 꺼낸 말이다.

 

6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 만석보 앞에서는 전농 전북도연맹 소속 농민들과 정읍시 태풍피해 농민들이 모여 ‘나락 백수피해 재해인정! 철저한 조사와 실질적인 보상 촉구!’ 논 갈아엎기 투쟁이 있었다.

 

 

만석보는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조세 등을 수탈할 목적으로 강제 동원하여 쌓은 보로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된 곳이다. 농민 수탈의 상징이 된 그 현장에서 120년이 지난 2012년 농민들은 수탈과도 같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논을 갈아엎었다.

 

▲1892년 농민 수탈의 현장 만석보에서 2012년 농민들은 농업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수탈과도 같은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올 봄에 씨 뿌려 키운 벼인데 갈아엎는 다는 것은 농민이 죽겠다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농민들의 마음도 몰라주고 대책도 없다”

 

7272㎡(평방미터, 0,7ha, 2200평)이나 되는 자신의 논을 갈아엎는 모습을 보는 이평면 김민기 씨(50세)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확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현재 논을 갈아엎기로 한 이유는 백수피해 때문이다. 김민기 씨의 논을 비롯해 전북지역 대다수의 논들이 백수피해로 올해 풍년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김민기 씨와 함께 있던 서기석 씨(이평면, 60세)는 “올해 태풍은 30년 만에 바람이 강했다. 나락의 알맹이가 수정해야 하는데, 바람 때문에 수정을 못해 알맹이가 없다. 집에 학생들도 많은데 올해는 참 걱정이 많다”며 같이 한숨을 쉬었다.

 

 

전북지역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힌 백수현상은 이삭이 패는 시기에 강한 바람이 벼의 수분을 빨아들여 이삭과 잎 등이 하얗게 말라죽어가는 증세이다.(때론 붉게 변해버리기도 한다) 전북도에 따르면 5일 오전 현재 13만351ha 가운데 4만1,545ha에서 백수피해가 있는 것으로 잠정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모작 등 모내기를 늦게 하는 지역이 많은 전북지역의 특성에 따라 피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겉보기에 멀쩡하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수정을 맺지 못해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가 되어버렸다.

▲이번 태풍으로 벼 이삭이 검게 물들었다.

 

봄의 극심한 가뭄과 여름의 폭염까지 어떻게든 농민들이 이겨냈지만, 이번 태풍 볼라벤과 덴빈은 농민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천재지변이었다.

 

정부 대책은 특별재난구역 설정과 공공비축미 수매
“현행 특별재난구역 설정으로 농작물 피해 보전 못해”
“백수피해로 나락 자체가 없을 판에 무슨 수매냐”

 

천재지변보다 한 해 농사를 공친 농민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었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대책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정부는 크게 대책으로 두 가지를 내놓았다. 하나는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지역에 대한 특별재난구역 선포와 다른 하나는 피해 나락을 공공비축미로 수매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6일 전북지역 남원, 정읍, 완주, 고창, 부안 5개 시군이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되어 복구액의 최대 70%까지 국비가 추가 지원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들 재난구역의 복구는 대부분 공공시설과 주택 등의 사유시설에 국한되며, 간접지원으로 건강보혐 경감, 재난복구 융자금 지원 등이 전부이다. 농민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피해인 백수피해는 재난구역 설정에 필요한 피해 집계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곡창지대로 불리는 김제의 경우 특별재난구역에 지정되지 못했다. 이번 태풍으로 벼 재배면적(2만1,964ha) 중 35%에 해당하는 7,800ha가 백수피해를 입었지만 시설피해가 지정된 지역들에 비해 적었던 것이 이유이다. 그래서 특별재난구역으로 정읍시가 지정된 7일, 정읍시 만석보에서 농민들이 안도의 한숨보다는 팔을 걷어 논을 갈아엎었다.

 

▲백수피해로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의 얼굴에는 주름이 더욱 늘어만 간다. 논 갈아엎는 모습을 보는 농민의 타는 가슴은 어떠할까?

 

이효신 전농 도연맹 사무국장은 “재난구역의 피해보상 기준을 살펴보면 시설피해에 대한 보상이 전부이다. 그러나 백수피해는 농작물 피해로 들어가 피해 집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농민들이 태풍 피해로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은 토사가 유출되어 농지의 형태가 바뀔 때뿐이다”며 특별재난구역이 가지고 있는 허점을 지적했다.

 

이어 하우스 피해에 대해서도 “비닐이 바람에 날라 가면 보상을 받을 수 없다”며 “비닐이 소모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닐대가 날라 가야 보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결국 특별재난구역 설정이 전북도 지방재정과 공공시설 등의 피해에는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전북지역 4만여 농가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농림수산식품부는 피해농가 지원을 위해 공공비축벼 수매 등급(특등, 1, 2, 3)에 잠정등외 규격(잠정등외 A,B)를 신설하여 추가 수매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의 반응은 싸늘할 뿐이다.

 

전농 전북도연맹은 “백수피해를 입은 벼들은 도정과정에서 다 날라가버리는 피해나락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벼들을 어떻게 수매하겠다는 것이냐”며 농산부의 대책에 대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을 했다.

 

결국 백수피해와 함께 병충해 피해 등 2차 피해가 예상되는 속에서 농민들이 납득할만한 대책을 정부는 내놓고 있지 못한 것이 현재 상황이다.

 

농작물 피해 지역도 포함된 특별재난구역 설정과 농작물 재해보상법 제정 시급해

 

한편, 이날 트랙터 7대는 약 30분 만에 7272㎡의 논을 갈아엎었다. 지난 늦은 봄부터 농민의 피와 땀이 들어갔지만, 태풍 피해와 정부의 대책 부족의 결과 벼들은 30분 만에 모두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렇다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날 논 갈아엎기 투쟁에 나선 농민들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보다 실질적이고 농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농민들이 내놓은 대안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장 김제와 같이 백수피해 등 농작물피해가 심각하지만 시설피해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다는 이유로 제외된 지역들의 특별재난구역 지정이다. 이들 지역이 지정된다는 것은 결국 농작물피해에 대해 정부가 보상 등의 대책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어 농작물 재해보상법 제정이다. 현재의 재해보상이 공공피해와 시설피해 중심이다 보니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농작물 피해 역시 보상이 가능한 재해보상법을 제정하는 것이 농민들이 원하는 대안이다.

 

하연호 전농 전북도의장은 “식량문제는 현재 세계적인 문제이다. 갈수록 수확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민들의 사회에 기여하는 바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며 “농업과 식량을 지키는 기반 확보를 위해서도,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도 태풍피해 등의 재해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단지 보상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며 “이 땅의 농업과 국민들의 삶을 지키는 문제이다”고 농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전향적인 고민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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