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기획취재한 '후쿠시마를 넘어 탈핵으로'를 참소리에서도 연재합니다.
<연재 순서>
① 쓰나미보다 거센 방사능 오염 후유증
② [기고] 시바타 기요시 신부 (예수회)
③ 원전 피난민, 누가 그들의 고향을 빼앗아 갔나
④ [인터뷰] 하야시 히사시 신부 (예수회 일본관구 사회사도직위원장)
⑤ 원전 없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
⑥ [인터뷰] 사와무라 가즈요 (핵발전소 필요없다 시모노세키 모임 대표)
시바타 기요시 신부(예수회)는 2011년 6월부터 6차례에 걸쳐 후쿠시마 현으로 자원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시바타 신부의 활동과 고민이 담긴 글을 요약 번역해 싣습니다. 이 글은 예수회 일본관구 사회사도직센터가 격월로 발행하는 소식지 ‘사회와 사목’ 172호(2013년 8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
재건 봉사활동 통해 바라본 후쿠시마…
피폭돼 숨진 아기 땅에 묻고 피난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고통,
타 지역민의 차별과 무관심으로 더욱 커져
그래도, “새로운 창조” 속에서 희망은 다시 살아난다
일본 동북지역(이하 토호쿠)에서 엄청난 재해가 일어난 지 약 2년 반이 흘렀다. 내가 그 지역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6월, 히로시마 교구에서 함께 일하는 가토 신부의 제안으로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미야기 현에 있는 일본 카리타스의 시오가마 본부를 찾아간 내게 주어진 임무는 각종 잔해와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었다. 솔직히 재해 지역의 현실을 직접 목격한다는 심적 부담이 컸던 나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들의 사연을 들을 기회는 거의 갖지 못했다.
다만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일하느라 하루에 족히 2~3리터는 될 법한 땀만 줄줄 흘려야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고통 받는 피해자들과 그들의 고향 땅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창조물”을 보내달라고 주님께 청하고 또 청했다.
자위대와 경찰, 소방관들이 여전히 실종자 수색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던 당시 그곳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경험은 나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안겨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본부를 총괄하며 자원봉사자들을 지휘하던 류이치 카마치의 모습이 그렇게 인상 깊을 수 없었다. 그는 “백 번의 설교보다 주어진 일에 여러분이 가진 모든 힘을 다 쏟는 게 훨씬 중요하다”며 우리를 독려했다.
자원봉사 일정을 마치고 야마구치로 돌아온 뒤에도 내가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재난지역의 주민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일단 자위대 대원들만큼 강한 체력을 길러보자는 마음에 운동도 시작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얼마 남지 않은 교구 바자회가 문득 생각났다. ‘성당 유치원 뒤편 언덕에서 사슴벌레를 잡아서 팔면 어떨까?’ 나는 다음날 새벽부터 열심히 사슴벌레를 잡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불과 나흘 만에 백 마리가 넘는 사슴벌레를 잡아 바자회에 내다팔았다.
그러자 유치원 학부모회 회장이 바자회 수익금을 어디에 쓰는 게 좋을지 물어왔다. 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재난지역의 유치원을 수소문했다. 그래서 알게 된 곳이 미야기 현의 가톨릭 유치원이었고, 그것이 우리 교구가 재난지역 주민들을 돕기 시작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해(2011년) 11월, 나는 두 번째로 후쿠시마 현을 방문해 니혼마츠 유치원의 학부모회 회장인 마모루 와타나베 씨를 만났다. 그는 기부도 물론 고맙지만 지역 재건에 힘써줄 자원봉사자들의 일손이 급하다고 했다. 사실 그 지역은 땅을 비롯한 자연의 전부가 방사능 오염으로 고통 받고 있었는데, 주민들은 방사능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특히 한정된 재원을 어디에 얼마나 사용해야 할지를 놓고 주민들 사이에 갈등도 빚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주민들의 논쟁에 끼어들기 보다는 유치원을 돕는 데 집중하기로 뜻을 모았다.
원래 와타나베 씨의 직업은 버스 운전사였다. 그는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난 직후 주민들을 버스에 태워 나미에 정(町, 일본의 행정구역으로 시와 촌의 중간 크기이다)에서 니혼마츠 시로 피신시키는 일을 했다. 당시 주민들은 금세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고 있던 옷 말고는 짐도 하나 챙기지 않은 채 버스에 올라탔다고 한다.
그런데 이동하는 동안 (방사능에 피폭된) 어린 아기들이 버스 안에서 숨을 거두는 일들이 발생했다. 그러자 그들을 안내하던 경찰과 자위대원들은 아기들의 시신을 그냥 산에 버리라고 지시했다.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다 시신조차 묻어주지 못하는 상황에 오열했지만, 지시를 따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후쿠시마 주민들의 고통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차별이라는 추악한 현실이 사고 직후 바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우리가 자원봉사를 마치고 이와테의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매니저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후쿠시마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바로 분무기부터 찾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승객들 중에서 “후쿠시마에서는 정차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말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또한 후쿠시마에서 생산된 우유는 바로 붉은 색 염료를 섞어 버린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판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가족들 전체의 생계를 유제품 생산에 의존하고 있던 축산 농가는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다.
후쿠시마의 상황을 설명하던 와타나베 씨는 “핵발전소가 정말로 안전하다면 왜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 발전소를 짓지 않냐”고 반문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나는 “새로운 규제책들을 세워놨으니까 이제 핵발전소는 안전하다”는 정부의 주장은 핵에너지 생산을 늘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진짜 의도, 즉 계속 싼 값에 전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자신들이 공들여 키운 사슴벌레를 가져와서 “후쿠시마 아이들한테 전해주세요”라고 말하던 따뜻한 마음씨의 우리 유치원 아이들에게 꼭 당부하는 것이 있다.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찾고 핵발전소를 완전히 없애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쿠시마에서 두 번째 자원봉사를 하고 돌아온 뒤, 나 혼자서는 절대 이 모든 걸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방학 동안 함께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에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모두 71명의 야마구치 현 주민들이 토호쿠 지역을 찾아 그곳 주민들을 돕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의 여행 경비를 후원해 주었다. 활동에 참여한 아주머니 한 분은 내게 그동안 자신의 가족 안에서의 삶에만 안주해왔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됐다며, 더 많은 주위 사람들이 함께하도록 힘써 보겠다는 다짐으로 나를 뿌듯하게 만들기도 했다.
실제로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가족과 직장,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진정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선한 마음과 연민의 감정들이 지진 피해 지역에서의 봉사활동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토호쿠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셀 수 없으리만큼 여전히 많다.
시바타 기요시 신부
예수회, 일본 히로시마 교구에서 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