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뉴스

노동/경제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함께한 쌍용차 171일 고공농성

정재은 참세상( newscham@newscham.net) 2013.05.09 16:24

4년 전 쌍용차 한상균 전 지부장에게 미숫가루 한 잔 건넸는데, 4년 뒤 커피 한 잔이 돌아왔다. 비극의 그림자로 따라온 차 한 잔의 ‘여유’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립된 공간에서 마시는 미숫가루와 커피 맛은 달달하기보다 쓰다. 5월 7일, 고공농성자와 의료진, 기자가 함께 커피를 마셨다. 두 평 남짓한 고공농성장의 마지막 손님이다. 한상균 전 지부장, 복기성 쌍용차비정규직 부지회장은 9일 오전 11시 171일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온다. 장기간의 고공농성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원인이다.

2009년 7월 23일, 실신 직전의 한상균 당시 지부장은 도장2공장 어느 문 앞에 걸터앉아 기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미숫가루를 마셨다. 노조 정책부장 아내의 자살 소식을 접한 날이다. 정리해고가 뻗친 살인의 손길로 77일 옥쇄파업 기간 동안 노동자와 그의 가족 6명이 사망했다. 그는 도장공장 옥상에서 통곡했다. 싸움을 멈추고 추도의 시간을 갖자고 애원했지만 나만 살겠다며 ‘좀비’처럼 달려든 회사 구사대와 용역, 경찰병력에게 그것은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먹지도 못하게 했고, 입지도 못하게 했고, 보지도 못하게 했고, 치료받지도 못하게 했고, 하다못해 잠조차 잘 수 없게 했던 2009년 전쟁터의 평택공장이다.

2013년 5월 7일, 까치도 살지 못하는 15만4천 볼트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169일째 위태롭게 고공 농성하는 한 전 지부장은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건넸다. 박근혜정부와 정치권이 국정조사 약속을 깨버리면서 그는 세상에 발붙이지 못하고 송전탑 공중으로 내몰렸다. 한 전 지부장이 농성장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동안 함께 고공 농성중인 복기성 쌍용차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은 건강 악화로 앉아있기조차 힘들어했다. 한여름도 아닌데 그의 얼굴빛이 검다.

덥수룩한 농성자들의 바빴던 고공농성 일상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는 도중 위를 보니 25미터 높이에서 덥수룩한 모습의 한 전 지부장이 미리 나와 반긴다. 그 모습에 농담을 던졌더니 한 전 지부장이 타박을 준다. 긴 머리 좀 잘라주고 갈 줄 알았더니 이발 가위 하나 가지고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30여 분간의 만남 내내 의료진의 진료를 받았던 복기성 부지회장은 말도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한다.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어 불편한 게 이만 저만 아니라면서도 한 전 지부장은 삭발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꼬집어 이유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삭발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고공농성장에 발을 들이면 덥수룩한 모습의 농성자들과 함께 플라스틱통으로 만든 화장실, 세숫대야와 비누가 놓인 단출한 세면장이 눈에 띤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대소변 통은 아래로 내리고 다시 올려 받았다. 물이 올라오면 세수와 양치 정도 했다. 음식 역시 마찬가지고 쓰레기 하나 나와도 봉지에 잘 담아 내려줘야 했다. 아쉽지 않게 잘 먹으라고 음식을 올려줘도 정작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을 너무 많이 줘서 탈이지요. 연대 온 사람들이 금방 다녀갔다고 음식 올려주는데, 바로 내릴 수가 없죠. 당연히 우리 생각해서 올려준 건데 서운해 할 거 아니에요. 여기 올라와서 먹는 양이 반으로 줄었어요. 아침에는 사과 한 쪽 먹어요. 많이 먹어봤자 움직이지 못해 소화도 안 되고 불편하기만 해요. 스트레칭 하는데, 끽끽 소리 나고 바닥이 울려요”

한 전 지부장은 고공농성장에서 “먹고, 자고, 싸는 게 일”이라고 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무조건 새벽 5시에 일어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뉴스 듣고, 스트레칭하며 출근하는 노동자들 맞을 준비를 했다. 아침 6시 50분부터 8시 15분까지 출근투쟁을 하고, 사과 한 쪽 먹고, 올라오는 3가지 종류의 신문을 읽었다. 다시 점심 먹으라고 음식이 올라왔고, 저녁에 퇴근투쟁을 했고, 밤 9시가 되면 잔업을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을 향해 또 퇴근투쟁을 했다. 퇴근투쟁 사이 고공농성장 아래서 주3회 촛불문화제가 열렸고, 때에 따라 또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출근투쟁, 퇴근투쟁할 때 여기서 아래를 보고 손 흔들면서 선무방송을 했어요. 에너지가 보통 드는 게 아니에요. 동료, 시민과 소통하는 거죠. 우리 요구를 알리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가 이웃의 문제가 아니고 나와 가족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죠.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소통했죠”

점심 먹고 오후 시간, 한 지부장은 틈틈이 책을 읽었다. 168일 동안 읽은 40여 권이 넘는 책이 농성장 한 구석 가방에 담겨있다. 그리고 연대 오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현대차 비정규직 고공농성장, 재능교육 고공농성장, 유성기업 검찰청 앞 농성장 등 전국의 투쟁하는 곳과 소식을 알리고, 듣다 보면 오후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의외로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올인해서 읽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야. 이불 까는 시간이 밤 10시 30분인데, 개인 시간이죠. 아침에는 연잎차를 좋아해서 한 잔 하고, 밤에 커피 한 잔 하며,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 물었죠. 나는 SNS와 친하지 않아 잘 못하는데, 복기성 동지는 SNS를 통해 세상에 우리 소식을 많이 알렸죠. 근데 요즘에는 복기성 동지가 몸이 아파 밤마다 신음소리를 냈어요. 내가 미안하죠...”

77일, 3년, 3개월, 171일...‘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시간

77일 옥쇄파업하고 바로 만 3년 감옥살이하고, 3개월 세상구경하다 171일 고공농성했다. 한 전 지부장은 대화 도중 종종 “아직 세상에 적응을 못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출소 뒤 고공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부지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77일 파업 동안 노조 간부를 맡으며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 3명이 4년 뒤 고공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한국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몸이 아픈 복기성 동지를 옆에 두고 이런 말 하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이놈의 세상이 목숨 걸지 않으면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공식화되어 버렸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저항하고, 제 몸에 불을 지르고, 목을 매고 하는 거잖아요. 나는 감옥에서 동지에 대한 갈증이 제일 심했어요. 동료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넋 놓고 바라보는 심정,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교차했죠. 그리고 감옥서 나와 보니까 여전히 할 수 있는 건 없고, 싸우고 있는 동지들의 모습이 밟혔죠. 김정우 지부장은 쌍용차 사태 해결해 보려고 또 밥을 굶어 생사를 오가고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다른 고민 자체가 사치였어요”


감옥과 다를 바 없는 고공농성장이었다. 감옥에 있으면 체념이라도 하지, 감옥보다 소통이 원활하고 쌍용차 평택공장이 바로 보이는 고공농성장에서는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엄습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몸과 마음이 옥죄어오는 힘든 시간이었다. 감옥에서도, 고공농성장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빵에서는 소리로 계절을 가늠했어요. 뻐꾸기가 울고, 꿩이 울고, 찌르레기가 울고, 매미가 울고. 찬바람 불면 기러기가 떼 지어 가는 소리도 느껴질 정도로. 여기서는 눈으로 계절을 느꼈죠. 겨울에 눈이 왔고, 봄이 와 꽃이 피고. 대신 빵에서는 좀 더 잘 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단절은 심하지만요. 하지만 여기서도 눈에 보이는 가족과 동지를 두고 고립되어 있으니까 또 다른 감옥이죠. 참, 신문 보는 시간도 다르구나. 감옥서는 점심 먹고 신문이 배달되니까요”

‘위안’삼는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책보는 시간’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말문이 막혔다. 꼬치꼬치 캐묻자 전남 나주에서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79세 노모의 소식을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많이 위로해 준다”며 말을 아꼈다.

“어머니가 여장부예요. 힘들 때마다 어머니와 통화했어요. 이왕 올라갔으니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도록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죠. 어머니 생각하면... 그리고 희망퇴직자, 무급휴직자 가리지 않고 격려의 문자가 오는 것을 보며 많은 위로가 됐죠. 함께 투쟁하지 못하는 미안함,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담은 문자를 볼 때마다, 안과 밖에 나뉘어 있지만 쌍용차 노동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전화가 올 때마다 정말 고마웠죠”


171일간의 고공농성 마무리...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같은 이들

복기성 부지회장은 건강 악화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타인에게 항상 반갑게 인사하고, 먼저 안부를 묻는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일 의료진 진료 결과 그는 위출혈, 허리디스크 증세를 보였다. 고혈압 증상도 심각했다. 의료진들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곳에 있다 보니 없던 고혈압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전 지부장은 감옥서 생긴 동상과 역류성식도염 증세를 보였다. 한 전 지부장이 복기성 부지회장의 상태를 대신 전했다.

“이 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으면 말이 별로 없게 되요. 하루 종일 몇 마디 안 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복기성 동지가 계속 아팠어요. 요즘 특히 허리가 아파서 앉아있지 못했고, 기력이 없어 계속 누워있었죠.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고, 코 풀면 코에서 피가 나와요. 여기서는 제대로 된 건강 검진조차 할 수 없으니까...”

고공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농성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는데, 회사는 사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 평택공장 앞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회사는 사태를 해결할 의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4년 동안 노조와 대화 한 번 안 했죠. 노조에서 먼저 유인물을 통해 올해의 화두를 ‘용서’와 ‘치유’로 삼자고 제안했어요. 절박한 벼랑 끝에 있는 해고자가 먼저 얘기한 거죠. 회사가 여전히 해고자 문제는 손을 떼고, 대화하지 않겠다고 입장이기 때문에 사태가 꼬이고 만 거예요. 회사는 시간 벌어 노동자 지쳐 떨어져 나가면 손해 볼 거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노동자가 아니라 회사가 손해거든요. 일례로 세계 기독교계에서 쌍용차 불매 운동까지 제안해요. 국제적으로 쌍용차 불매 입장을 낼 수 있다는 거예요. 고통 받는 자에게 ‘인간적 도리’로 교회가 할 일이라는 거죠. 회사는 이런 흐름을 알아야 해요”


정부와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나서면 경찰병력을 동원해 ‘무조건 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국정조사를 약속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서울 중구청이 나서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강제 철거했다. 쌍용차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치권의 여야협의체도 유야무야되고 있다.

“정치권의 압박도 처음에는 좀 먹혔죠. 그러다가 새누리당 이한구가 나서니까 입장이 바뀌었지요. 정부와 자본이 합작을 해버리니까 회사가 기고만장한 거예요. 회사, 정부, 정치권이 쌍용차 상처를 치유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대선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여론이 모아졌기 때문에 상당히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봐요.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고, 절대 묻히지 않는 문제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죠. 특히 노동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는데, 다시 이명박의 친재벌 정책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보여요.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고공농성은 끝나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강해질 겁니다”

한 전 지부장은 쌍용차에 대해 ‘회계조작의 공장, 기획부도의 공장, 죽음의 공장, 노동탄압의 공장, 망령이 떠도는 공장’이라고 했다. 수십 가지의 오명을 뒤집어 쓴 회사, 수백 명을 잘라 길거리로 내 몬 회사를 눈앞에 두고 이들은 고공농성장에 작은 소나무 두 그루를 키우며 171일간의 고공농성을 버텼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생체실험실과 같았던, 공권력이 더 이상 공(公)권력이 아니었던 평택공장에서 이들은 77일간 투쟁하며 파업 노동자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가 한상균 전 지부장과 복기성 부지회장과 닮아 보이는 이유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