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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경제 4명 노동자 떠나보낸 ‘늙은 노동자’의 눈물

윤지연(참세상)( newscham@newscham.net) 2013.01.18 13:13

1년이 넘게 ‘술 한번 마시자’는 약속이 번번이 좌절됐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서로에게 ‘이번에도 만나지 못하면 아는 척도 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1월 11일 금요일. 서둘러 일을 끝마치고 약속장소인 대한문 촛불집회 장소에 도착했다. 어렵게 만난 이상, 오늘만큼은 편안히 먹고 마시며 ‘즐거운 금요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남대문 근처의 곱창집에 들어가, 이용대 한진중공업 조합원과 마주앉았다. 우선 진한 소주를 한 잔씩 마시고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오늘은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난 거 아니다. 삼촌과 조카처럼 사는 얘기나 하자”는 그의 말에 “나도 놀러 나왔어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 테이블에 수첩과 볼펜을 올려놓았다. “너무 미안해요. 그런데 이 기사 꼭 쓰고 싶어요.” 참을성 없는 기자의 간청에 이용대 조합원이 맥빠진 웃음을 짓는다.

박창수 열사, 김주익 열사, 곽재규 열사, 최강서 열사까지. 그는 피붙이 같은 네 명의 동지를 떠나보냈다. 때문에 한진중공업 노동자로 살아온 26년의 시간은 항상 ‘떠나보냄’의 연속이었고, 늘 복수로 이를 갈던 시간이었다. 그가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술자리는 술반 눈물반이 돼 버렸다. 박창수 열사와 즐겨 부르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끝내 다 부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린 그는 소주보다도 쓰디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용대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1985년. 이용대 씨는 스물 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그리고 4년 뒤인 89년. 그의 옆에는 ‘박창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동지이자 술친구인 그와 ‘현장 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박창수 열사가 사망한 91년까지 약 2년간, 두 청년은 함께 망월동 묘지를 갔고, 전노협 출범식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창수랑은 술을 많이 마셨어. 그래서 일화도 많아. 12월 중순쯤 됐나. 나랑 창수랑 또 다른 한 명이랑 같이 술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려고 회사로 들어왔어. 그런데 화장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단 말이지.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트리에 달려있는 솜에 불이 붙어 버린 거야. 그래서 트리를 엎어버렸어. 당시 회사가 노조 탄압을 할 때였고, 회사가 트리를 만들어놓은 줄 알고 화가 나서 그냥 엎어버린 거지. 근데 알고 보니까 그건 여직원들의 모임이었던 ‘예지회’가 설치해 놓은 거였어.

다음날 창수랑 예지회 사무실에 불려갔지. 우리를 세워놓고 여직원들이 빙 둘러 앉아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고 쏘아붙이더라고. 그래서 창수가 ‘회사에서 만들었으면 물어줄 이유가 없지만, 예지회에서 만들었다고 한 내년 이 시간에 똑같은 트리를 설치해주겠다’고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나서 풀려나왔는데, 그 약속을 창수는 잊어버리지 않았어. 다음해에 나랑 창수랑 똑같은 트리를 사려고 국제시장을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다행히 같은 트리를 사긴 했는데, 설치를 해 본적이 있어야지. 우리가 애를 먹고 있는데 예지회에서 ‘진짜 약속을 지킬 줄 몰랐다’며 대신 설치하겠다고 하더라고. 예지회도 진짜 우리가 약속을 지킬 줄 몰랐나봐. 우리한테 다 반한 것 같았어. 특히 창수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더라고. 그걸 깨달았지.”


박창수 열사 생전 모습 [출처: 금속노동자]

1991년 5월 6일. 박창수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안양병원에서 사망했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자살. 병원 옥상에서 투신했으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간단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하지만 이용대 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그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이 씨는 지금까지도, 박창수 열사의 죽음에 물음표를 던진다.

“창수가 91년에 죽었는데 의문사야. 노조에서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사를 해 봐도 밝혀지지 않았어. 근데 자살은 아니야. 나는 타살이라고 생각해. 당시가 공안정국 이었잖아. 그리고 자살할 사람이 링겔 병을 꽂고 뛰어내릴 이유가 없어.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특히 창수는 죽을 이유가 없었어. 자기 가족들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창수가 죽고 시신이 탈취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지.

창수가 죽었을 때, 나는 대의원이었어. 창수는 기타도 잘 못 치면서 매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연주했는데 징글징글해 죽을 뻔했거든. 근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양병원으로 올라가는데 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거야. 전국노동자장을 치르고 나서 창수가 열사가 됐어. 근데 창수한테 열사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더라. 나랑 같은 파트에서 일했던 동료이자 내 술친구를 열사라고 부르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출처: 금속노동자]

그로부터 12년 후인 2003년 10월 17일. 당시 한진중공업 지회장이었던 김주익 열사가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중 목을 매 자살했다. 현장에서는 유서 2통이 발견됐다. 유서에는 회사의 손배가압류와 노동탄압에 대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그는 크레인 밑의 동지들에게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주익이가 죽은 건 아침에 알았어. 원래 매일 아침, 조합원들이 크레인 밑에서 ‘김주익 지회장님’하고 부르면 주익이가 나와서 손을 흔들었거든. 근데 그 날은 ‘김주익 지회장님’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대답이 없는 거야. 노조 간부가 뛰어올라갔지. 주익이가 크레인 붐대에 자기 먹을 밥을 실어 날랐던 빨래줄에 목을 맸다는 거야.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 복수, 복수,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 이후, 이용대 씨는 분노와 절박함, 그리고 자책에도 시달렸다. 크레인 농성과 함께 천막농성이 길어지면서, 천막을 비우고 집에 오고갔던 시간들이 후회스럽게 떠올랐다. 천막농성자 130명에 대한 회사의 해고통보 준비 소식에, ‘모른척 할걸’ 이라며 후회했던 기억도 자책으로 남았다. 그래도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김주익 지회장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었다.

김주익 열사가 129일의 고공농성 후 목숨을 끊은 85호 크레인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주익이랑은 같은 과에서 근무했고, 같은 축구동아리였어. 주익이는 진짜 공을 못 찼는데, 조합원들 만나려고 동아리를 하는 거였어. 나는 공을 못 차면 뭐라고 하거든. 우리 부서가 이겨야 하니까. 내가 축구동아리 회장이었는데, 그래서 주익이를 주전으로 집어넣지 않았어. 그래도 주익이는 맨날 조합원들이랑 휩쓸려서 놀았지. 뒷풀이 가면 주익이는 안주를 진짜 많이 먹어. 그러고 나서 노래방에 가면 구석에서 코를 골면서 자는 애가 주익이었어.

애가 진짜 착해. 원래 노조 간부들은 관리자와 어울리기 좋아하잖아. 근데 주익이는 전혀 그런 게 없었어. 일 하다 10분 쉬는 시간이 있으면 노조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와. 진짜 열심히 활동했어. 쉬지도 않고. 곰탱이 새끼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끝내 부르지 못한 노래

떠나간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며 그는 울었다. 그립고, 보고 싶고, 화가 나서 울었다. 어느 샌가 ‘취중인터뷰’가 돼 버린 것 같아 죄송스러워 분위기를 반전시켜보고자 “노래 한 곡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그의 입에서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흘러나온다. 청년 시절, 박창수 열사와 기타를 치며 지긋지긋하게 불렀다던 그 노래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 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가리라”

그는 끝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다시 말 문을 열 때까지, 한참동안의 울음이 이어졌다.

김주익 지회장의 사망 이후, 불과 보름 만에 곽재규 열사가 또 다시 사망했다. 배달호 열사, 김주익 열사, 곽재규 열사까지. 노동계는 그 해 열사정국을 맞았다. 두 명의 열사가 만들어진 한진중공업 현장에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분노했고, 오랜 투쟁에 지쳐 이탈했던 조합원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재규 형은 주익이가 죽고 15일 만에 죽었어. 재규 형은 집안 사정도 안 좋아서 간간이 돈을 벌러 돌아다녔거든. 근데 주익이가 죽고 15일 동안을 노조 사무실에서 혼자 술 먹고, 고민하고 그러는 거야. 그 때 재규 형이 노조 총무였거든. 갑자기 자기가 끼던 장갑 같은 걸 다른 사람한테 나누어 주고, 장부 정리도 싹 다 해놓더라고. 이미 죽을 생각을 한 것 같아.

그러다가 도크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재규 형인거야. 회사에서는 형이 소변을 보다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고 여론전을 했지. 근데 재규 형 부검에 내가 들어갔었거든. 배를 갈라보고 부검을 해 보니 소변을 보다 실수로 떨어진게 아니야. 자살이라고 했어.

재규 형이 죽고 난 뒤에는 회사에서도 손을 들었지. 김진숙을 제외한 해고자가 다 복직됐고. 단협에서도 엄청 많이 따냈어. 김주익, 곽재규 열사가 따낸 거지. 물론 지금은 복수노조에서 다시 회사에 다 내줘 버렸지만. 그때 조남호는 얼마나 이를 갈았겠어. 9년 만에 복수한거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이들의 주문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2003년 그 해, 열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본과 정부의 손배가압류 문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노동계는 ‘열사정국’을 선포하고 투쟁을 조직했다. 민중진영들은 자본의 손배가압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하지만 아픈 역사는 반복됐다. 그로부터 9년 뒤,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가 회사의 손배가압류에 항거해 목을 맸다. 이제 끝난 줄 알았던 한진중공업의 ‘죽음의 악몽’이 또 다시 되살아난 격이었다.

“강서가 죽은 날 아침, 문영복 수석이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갑자기 ‘강서야! 강서가 목을 맸다!’라고 소리를 질렀어. 그래서 뛰어 들어갔지. 그 때 나를 포함해 네 명이 있었는데 강서를 바닥에 눕혀서 심폐소생술도 하고, 인공호흡도 했어. 내가 119에 신고하려도 전화를 누르는데 막 손이 떨려서 계속 오타가 나는 거야. 미치겠더라고.

처음에는 눈물이 안 났어. 근데 강서를 해동병원으로 옮기고, 사망판정을 들은 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는데 비가 주륵주륵 오는 거야. 공장 앞에 걸려 있는 ‘최강서 열사’라는 플래카드를 보니 그 때야 눈물이 나더라고. 한참을 울었어.

강서가 죽기 얼마 전에 술이 취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어. ‘형님, 진짜 살기 힘드네요. 속상합니다. 그래도 끝은 있겠지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그래, 끝은 있겠지’라고 했더니 ‘씨발, 회사가 망하든 내가 죽든 끝까지 해볼랍니다’라고 말하더라고. 그게 마지막 대화였어. ‘끝은 있겠지요’라는 말이 이런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고 최강서 열사 사망 이후 현장 [출처: 이용대 조합원]

최강서 열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이라며 호소했다. 그래서 이용대 씨를 비롯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그토록 독한 사람이었던 최강서 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2011년에 강서랑 같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희망자전거’를 한 적이 있었거든. 내가 단장이었고 강서가 멤버였어. 대구 KEC쯤 왔을까. 막내가 허벅지 통증으로 자전거를 못 탈 것 같은 거야. 부산역 희망버스 행사에 맞춰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막내를 포기시키고 스태프차에 실었어. 그 날 저녁 강서가 찾아오더라고. ‘형님, 7월 31일 3차 희망버스 행사에 맞춰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200일 넘게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지도를 죽일지 살릴지가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이렇게 포기하면 김지도를 살릴 수 없어요. 자전거를 줄로 끌고 가던 끝까지 해 봅시다’라고 말하더라고.

독한 놈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서 정말로 자전거를 끈으로 묶어서 끌고 갔어. 31일 날 부산역 행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10미터 쯤 멀리서 강서가 날 보면서 씩 웃더라고. 그게 억수로 멋있게 보이는 거야. 그 독한 놈이 얼마나 분하고 힘들었으면 죽었겠냐고.

강서는 나보다 한참 어리잖아. 나이가 몇 살 되지도 않았는데, 죽어서 서른 살이나 많은 형님들한테 절을 받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런데 나는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더라. 동생들 죽여 놓고 살겠다고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 내가 사람 새끼냔 말야.”


그에게 소중한 동지를 잃은 고통은 너무 깊었다. 그래서 긴 시간 가슴을 치며 자책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그가 쓰러질 수 없었던 것은, 열사들이 그에게 남기고 간 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해고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지만, 조용히 희망퇴직을 하면 1억 원 가까운 돈을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아직 열사들과 동지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1억 원? 나한테 엄청 큰 돈이지. 근데 그 친구들 앞에서 그런 짓 못해. 내가 어떻게 재규 형님 앞에 그렇게 하냐고. 재규 형님은 내가 축구동아리 회장 할 때 총무였는데, 내가 실컷 부려먹어 놓고 죽어버렸어. 형님은 내가 말을 함부로 해도 잘 받아줬고, 동아리 하면서 돼지고기가 필요하다고 하면 총알같이 사오고는 했어. 그런 형을 보내고 나니... 인간성이 더러운 놈들이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나같이 마음은 또 약해요.

내 팔자도 참 기구하지. 술친구, 동료, 동아리 친구, 같이 해고됐던 동생을 모두 보내고 남았으니.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죽냐고. 근데 너무들 하잖아. 남아있는 나는 어쩌라고. 이들은 미련 없이 목줄을 다는데, 그럼 살아있는 나는 뭔데...”


열사 옆을 지키는 이들의 삶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는 죽음의 밑바닥으로부터 ‘삶’의 경계선으로 매일 기어오른다. 이용대 씨 역시 자신을 자꾸 밑바닥으로 몰아넣은 이들에 분노하며 매일을 싸운다. 지치지 않기 위해, 도망가지 않기 위해 매일 ‘비겁해지지 말자’는 주문을 건다.

“내가 개를 1년 정도 키운 적이 있어. 고작 1년을 키웠는데도 정이 들어서 어쩌지를 못하겠더라고. 근데 27년을 부려먹은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짜 개, 돼지, 소 에게도 이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우리 노동자들은 회사한테 개, 돼지만도 못한 거야. 그래서 나는 싸울 거야. 걱정하지 마. 절대 비굴하게는 살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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