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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 달 일하더라도 쌍용차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심형호(미디어충청)( cmedia@cmedia.or.kr) 2012.01.30 10:39

쌍용차지부 희망텐트촌의 최고령자는 내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정비지회조합원 박 일(58) 씨다. 그는 2009년 정리해고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산자’였고, 88년 입사 이후 한번도 노동조합의 간부를 맡지 않았음에도 옥쇄파업에 끝까지 참가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 처분을 받았다.

 


지난 1998년 IMF시기에 쌍용자동차가 대우그룹으로 인수되고 다시 2000년 대우그룹에서 분리, 2005년 상하이차에 매각, 2010년 마힌드라에 인수되는 소용돌이와 같은 과정에서 정비지회는 눈에 띄는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는 수리센터의 아웃소싱인데, 본사 직영으로 운영되던 전국 10여 곳의 사업소가 서울만 남기고 모두 다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1200여명의 노동자들 중 1000여명이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IMF 시작되고 대우가 들어왔다 나가면서 계속 아웃소싱 됐고, 조합원들이 계속 줄어들었죠. 나쁜놈들이라는 생각 밖에 안들었어요. 결국 상하이차 까지 온 것 인데 동료들과 후배들 때문에 끝까지 남겠다는 생각으로 버텼죠.”


그는 오랜시간 동안 쌍용차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살아온 정비의 베테랑이다. 그런 그의 기계 정비 경력은 놀랍게도 17세 때부터 시작된다. 포항에서 출생하고 기계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서울로 바로 올라와 전국의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기계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식도 안가고 바로 중장비 정비 기술을 배우기 위해 회사에 들어갔죠. 영동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등을 돌아다니면서 정비 기술을 익혔는데, 한 6년간은 그렇게 돌아다닌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주특기 살려서 차량정비를 했고, 전역하고 나서도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기계정비 일을 했죠.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도 갔었고 사이판 가까운 곳에 미 해군기지 준설 공사 하는 곳도 갔었고, 좋은 데만 골라서 갔다 온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국내와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던 박 씨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일터는 쌍용자동차 서울구로정비사업소였다. 그가 입사한 88년도의 쌍용자동차는 코란도훼미리의 생산으로 국내 독보적 4륜구동차 생산업체가 된 시기였다. 따라서 업무는 당연히 많았지만 탄탄한 노동조합 덕분에 현장분위기는 좋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 당시 노조는 굉장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어요. 87년 이후라는 시기도 그렇고 원래 쌍용차가 입사와 동시에 조합원이 되는 유니온샵 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87년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지금 현장은 엉망이예요, 8.6 합의 이후 공장안에 새롭게 만들어진 기업별 노조가 모든 걸 바꿔놨죠. 단협상에 있는 부당해고 이후 복직하고 나서 받는 돈도 깍아 버렸고, 정비지부장은 전임자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일을 하고 있고...현장이 완전 개판이죠. 완전 어용이라고 볼 수 밖에 없죠.”


 
77일의 추억


쌍용차에서 정리해고 명단이 발표된 2009년, 박 씨는 정년퇴직을 불과 5년 앞두고 있었다. 단 한번도 노동조합 간부를 해본적이 없다던 그가 77일간의 옥쇄파업에 뛰어든 이유는 단지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기 때문이었다.


“조합원이기 때문에 들어갔어요. 공장안에 나보다 나이 많은 조합원도 있었지만, 정리해고 대상이 아닌 사람 중에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2명으로 구성 된 ‘직’을 책임지고 있는 ‘직장’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명 중 5명이 정리해고 대상자였지만 모두 함께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없었다. 모두가 조합원이었던 것이다.


“후회는 없죠. 생각해보면 8월 3일(경찰, 용역, 구사대 도장공장 진입 시도 하루 전)쯤에 먼저 나가면 안되겠냐고 우스갯 소리로 물어보니깐 ‘형 이제 다 끝나가요’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때 나갔으면 아마 징계해고 되지 않고 일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후회는 안해요.”


“가족들 한테는 조금 미안해요. 평택공장으로 들어갈 때는 가족들이 별말 없었지만, 공장 울타리 밖에서 떨어져 만났을 때는 위험하니깐 빨리나오라고 했거든요. 그래도 나갈 수는 없었어요.”


8.6 합의를 통해 쌍용차 노사는 ‘직영 정비사업소 및 관련 부품마케팅 일부에 대한 분사계획은 철회한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측은 합의 이후 곧바로 남아 있던 4개의 직영 정비사업소 중 3개를 아웃소싱 한다. 이미 그때부터 8.6합의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 달 일하더라도 꼭 복직하고 싶다


박 씨는 현재 징계해고와 관련해 해고무효 소송을 진행 중이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인정을 받았으나 결국 행정 2심 까지 왔고, 지난 1월 16일 서울고등법원 306호에서 사측 변호인으로 고용된 ‘김앤장’ 로펌을 만나게 된다.


“섬뜩했어요. 걔들은 파워가 있잖아요? 잘못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기술유출 재판도 사측에서 ‘세종’을 붙였거든요. 회사에서 법적대응에 거대 로펌을 갖다 붙여서 돈을 쓰는 걸 보면 파업한 사람은 절대 받을 생각 없다는 것으로 보여요.”


“우리들은 서울정비사업소에 차 수리하러 들어 갈 수 는 있어도 투쟁 조끼 입고 들어갈 수 없어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이기고 첫날 사업소에 한 번 들어가게 해주더라고요. 올라가서 현장 순회 한번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는 아예 못 들어가게 해서 정문에서 밀고 땡기고 하다가 쫓겨났죠.”


정비지회의 징계해고자들은 지난달부터 평택공장 앞 희망텐트촌에 모여 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 사업소 앞에서 출근투쟁을 하고 타 사업장에 연대를 다녔지만, 지금은 힘을 모아야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 씨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조합원들을 다시 뭉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7일간 옥쇄파업을 통해 똘똘 뭉쳤던 조합원들이 사측에 의해 무급휴직자, 희망퇴직자, 징계해고자 등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회사서 갈라 논 노동자간의 분열은 생계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단 안타깝다는 마음이 가장 앞서죠. 지부가 옥쇄투쟁 이후 징계해고자들에게 통상임금의 100%를 1년동안 지급했고, 정리해고자들에게도 1년간 일정한 돈이 나왔지만 무급휴직자들에게는 생계비가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무급자들과 그 돈을 나눴어야 했어요. 그때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죠. 노동계에서도 이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생각 못했던 것이었죠.”


“사측이 무급자들에게 4대보험을 넣어줬지만 생계비가 없으니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었겠어요. 지부에서 만약 돈을 나눴으면 투쟁을 더 적극적으로 해볼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물론 그 때 돈을 나눴어도 문제는 있었을 테죠. 돈은 한정되어 있으니깐요. 하지만 그 때 당시 그렇게 돈을 나눴다면 지금처럼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희망텐트촌에 모여있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은 회의를 하면서 “내년에는 꼭 박일 형님 복직시켜 드려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박 씨도 한 달이라도 좋으니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이먹고 고생한다며 가족들이 그만하라고 하죠. 그래서 작년 한해만 하고 그만둔다고 했지만 올해 재판도 있으니깐 더 해야 한다고 타일러 놨죠. 사실 해고되고 나서 마누라하고 애들한테 내 자존심이 상처 받은 것도 있어요. 그래서 한 달만 일하더라도 공장으로 꼭 돌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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