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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경제 [기고] “네 탓이 아니다. 운남아”

박성식(민주노총 부대변인)( icomn@icomn.net) 2012.12.26 12:44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故 이운남 노동자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에 앉히는 사회. 그 절망을 목격한 날이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청년들이 생을 포기했습니다. 그 중의 한 청년. 아니 어느덧 쓸쓸한 독신 중년이 돼버린 이운남. 그는 저의 후배입니다. 죽음의 소인이 찍힌 그 이름을 발견한 밤. 울산으로 달려오는 차에서 슬픈 노래는 줄곧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박근혜 시대의 비극적 노동의 상징으로 녀석의 죽음을 읽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발기인이자 초대 조직부장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내게 운남이는 마음 여리고 안쓰러운 후배로 기억됩니다. 잇단 노동자의 죽음으로 술렁이는 노동계가 버젓한 사업장도 화려한 이력도 갖지 못한 운남이를 열사로 추서하며 예를 갖추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입니다. 다만 녀석의 선배로서 욕심이 있다면, 사람들이 운남이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이해하며 그를 보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꺼내놓을 녀석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이는 선배로서 제 나름의 애도이기도 합니다.

 

야학노동자로서 그를 만나 우리는 1990년대 초 울산으로 내려와 20대를 함께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팔남매의 집안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타향의 노동살이로 가족 간의 왕래가 적었던 그와 형제가 없었던 저는 서로 기대며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말이 노동운동이었지 몇몇 20대 어린 노동자들의 의기투합에 호락호락할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차 하청업체를 전전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사업장에 배포되는 유인물들을 챙겨봤습니다. 양봉수 열사가 돌아가시고 현장이 들썩일 땐 월담까지 해가며 부르지도 않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집회에 끼어들던 무용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책을 힘겹게 읽어가며 학습도 하며 일견 노동운동가가 된 양 들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를 지배하던 정서는 흥분과 자심감이기 보다는 불안과 막연함이었습니다. 특히 운남이의 표정은 늘 어두웠습니다. 하기야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전남 영암에서 가난한 집의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운남이에겐 세상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시골 가난한 집의 다산(多産)이 때론 형제자매간의 각별한 우애로 미담이 되기도 하지만, 미담은 미담일 뿐 실상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운남이네 식구 역시 일찍 두 형제가 죽고 운남이 또한 중학교만 졸업한 뒤 노동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녀석은 문학을 좋아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유명한 마찌꼬바 지역인 성수공단에서 일하며 야학에서 부족한 공부를 채우고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갔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역시 문학을 좋아하던 여성노동자를 만나 연애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졸에 울산까지 와 연탄불 때는 싸구려 월셋방에서 하청노동자 신세를 전전하는 청년의 연애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 여인이 차갑게 돌아서던 날. 자신 있게 울지도 못하던 운남이는 모든 게 제 못난 탓이라며 자책했습니다.

 

녀석은 늘 모든 게 자기 탓이었습니다. 애인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자기 탓이고, 무식해 학출들 학습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제 탓이고, 말주변이 없어 활발히 섞이지 못하는 탓에 운동가의 자질도 없다며 늘 자책했습니다.

 

반면 녀석이 남을 탓하고 화내는 것을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던 그에게 동지들 간의 분열과 다툼은 가장 큰 고뇌였습니다. 노동해방을 향한 청춘의 꿈이 지리멸렬해 산산이 흩어지고 선배들이 대학으로, 법조계로, 사교육 시장으로 떠날 때, 못난 자신은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면서도 선배들이 존경스럽고 좋다던 바보 같은 운남이었습니다.

 

그런 녀석이기에 생을 떠나면서도 자책입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철탑에 오르고 맞아가며 탄압받는 것도 제 탓이고, 생명부지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자결한 것도 제 탓이었습니다.

 

그런 녀석이 가장 기뻐했고 가장 좌절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현대중공업 직업훈련원을 거쳐 드디어 정규직으로 옮기던 그 날. 그러나 그 날은 너무도 허망하게 끝났습니다. 입사 신체검사에서 발견된 경미한 디스크 ‘가능성’ 때문에 입사가 무산됐습니다. 그 날 단 하루만 무사히 넘겼어도 오늘 이리 허망하게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운남이의 곁에서 가장 안타까워하며 그를 보내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현대중공업 정규직입니다. 운남이는 예상치못한 결과로 입사가 무산됐지만, 가장 친했던 그 친구는 정규직이 됐습니다. 그리고 운남이가 다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를 전전하고 택배일과 택시를 하면서도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할 때, 그 정규직 친구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래도 운남이는 그 친구를 가장 사랑하며 자신의 형제로 여겨왔습니다. 사내하청노조를 만들어 투쟁할 때도, 해고돼 탄압받을 때도 그 친구는 늘 운남이의 힘이었습니다. 함께 뒹굴던 예전에도, 홀로 보내는 지금도 그 친구는 운남이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습니다. 평소 외로움을 달래주며 술잔을 기울이고, 아프면 약도 사다주고 19층에서 떨어지던 그날에도 운남이를 지켜주며 마음의 병을 덜어줄 병원도 알아보며 애를 썼지만, 결국 짐이 되기 싫었던 운남이는 홀로 훨훨 세상을 떠났습니다.

 

회한이 밀려옵니다. 너무도 여리고 착한 사람, 이운남에게 강하게 버티고 싸워야 할 노동운동은 자신을 이기는 혁명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혁명이 실패하고 마음의 병을 얻은 운남이를 우리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투쟁할 때는 둘도 없는 전우고 동지지만 부상자는 챙겨 볼 여유는 없는 걸까요? 약자들을 위한 우리들의 투쟁에서도 냉정한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걸까요? 혹시 나는 동지들에게 왜 강해지지 못하냐며 질책한 적은 없던가요? 사람의 온기가 없는 냉철한 논리와 조직만으로 상처받은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이운남 열사, 어쩌면 그는 오늘 우리와 멀어져버린 대중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더 이상 좁은 방에 갇혀 흐느끼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여전히 우리는 대중과 동떨어진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처만 남을 뿐”이라는 운남이의 글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질문을 전집니다. 그를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것은 비정규직의 차별과 불안, 노동운동에 대한 자본의 혹독한 탄압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고립과 절망에 나 또한 가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녀석이 왜 자기 목숨을 끊으면서도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까. 미안한 것은 우립니다.

 

뒤늦게 유족들이 찾아온 영안실 방명록에 마지막 말을 남겨봅니다.

 

“살 때 보지 못하고 죽고 나서 찾아와 미안하다. 후배인 네가 늘 먼저 연락하곤 했는데, 더 자주 말 걸고 함께하지 못해 또 미안하구나. 사흘 후면 크리스마스네... 십여 년의 세월 너와 함께 하면서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낸 기억도 없구나. 올해 크리스마스는 너와 함께 보내야겠다. 그래도 미안하다. 운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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