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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강남대로 눈길에 희망이 포개지다

오도엽(시인)기자( newscham@jinbo.net) 2012.02.02 18:08

눈 내리는 강남대로를 따라 뚜벅뚜벅 희망의 발자국이 찍혔다. 앞선 이의 눈발자국 위에 함께 하는 이의 연대의 발자국이 사뿐히 포개졌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의 뚜벅이 둘째 날은 이처럼 도로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진행되었다.

 

[출처: 오도엽]

31일 오전 6시가 넘어서자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로비 침낭 속에 몸을 구긴 채 지난밤을 새운 뚜벅이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폈다. 잠을 깬 이들은 사람을 위한 서비스가 아닌 돈벌이 서비스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세종호텔 측의 특급 서비스에 잔뜩 볼이 부었다. 지난 밤 파업 농성장 화장실의 따뜻한 물이 끊겼다. 지하계단 옆에서 잠든 이는 찬바람이 불어 깨어보니 출입문이 열려 있기에 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찬바람이 침낭을 파고들어 출입문을 살펴보니 아예 문짝을 뜯어두었더란다. 온돌도 아닌 로비 바닥, 히터 가동도 중단된 호텔 농성장에서 자는 이를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아예 얼음덩이로 만들려고 한 것 아니냐며, ‘이게 무궁화 다섯 개 특2급 호텔의 실상이냐’며 분노한다. 지난밤은 영하 10도의 한파였다.


오전 9시 20분께 희망 뚜벅이와 함께하는 노동법률가 단체 소속의 변호사와 노무사들이 세종호텔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갖았다. 권영국 변호사 등 참가자들은 “지금의 법제도는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며, “억울한 이들을 외면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짓밟는 것은 악법이며,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희망 뚜벅이 둘째 날 행진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종호텔에서 채 50미터도 나가지 못하였다. 남대문 경찰서 경찰들이 인도의 앞뒤를 봉쇄하고, 첫째 날처럼 몸자보를 떼지 않으면 인도로 걷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며 희망 뚜벅이를 감금하다시피 하였다. 희망 뚜벅이의 몸자보에 붙은 내용은 구호가 아니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 뚜벅이’이라고 적힌 단체복과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역시 분홍빛을 ‘빨갛게’ 여기는 경찰 지휘부의 ‘경기’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1시간 30분 동안 갇혀있던 희망 뚜벅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으로 향했다. 그곳도 경찰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막히면 돌아가거나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장충단 길을 지나 한남대교, 신사역을 걸어 삼성 본관이 있는 강남역 8번 출구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1시 30분. 이곳에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삼성에게 빅엿을 선사한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었다. 굳이 여기서 구구절절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이에 따른 인권 침해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은 이가 몇이고, 지금도 투병 중인 노동자가 있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절망과 죽음은 2012년 노동자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감금으로 행진이 늦어진 희망 뚜벅이는 점심을 거른 채 논현역 1번 출구 앞에서 지난 8년 동안 2번 해고를 당한 시그네틱스 노동자들과 짧은 집회를 갖고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2시 40분이다. 김밥, 오뎅국밥, 꼬마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행진하던 뚜벅이들에 모처럼 밥상다운 밥상이 차려졌다. 양푼 가득 돼지고기가 송송 들어간 김치찌개에 라면 사리까지. 아침에 또 김밥이 나오자 잠시 한숨이 나왔다. 오늘 20키로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 김밥! 하지만 이내 옆에서 김밥을 입에 넣고 있는 1500일을 이리 먹고, 두들겨 맞으며 싸운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을 본 순간, 한숨을 뱃속 깊이 꿀꺽 삼켰다. 점심에 차려진 김치찌개 앞에 잠시 숙연해졌다.


배를 두둑이 하고 식당을 나서자 눈이 내린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눈발이 굵어진다.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눈에 갈 길이 험해졌다는 두려움 대신 희망 뚜벅이들은 장난꾸러기가 된다. 강남대로를 따라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로 향하는 뚜벅이들은 잠시 쉬는 참이 생기면 눈싸움을 한다. 내 종아리는 얼얼하고 내 발바닥은 쿵쿵 가쁜 숨을 내쉬는데, 하얀 눈을 보며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한없이 행복해한다. 마치 눈이 자신이 빼앗긴 고봉밥인양 말이다. 행복은 절망을 함께 나누는 벗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맞출 때, 한발짝 한발짝 발자국을 포갤 때 있는 것 같다.


모질게 내리는 눈발 속에서 지금 희망 뚜벅이들은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 주저앉아 기독교 목사들이 연대하는 기도회를 하고 있다. 오늘 내리는 이 눈이 절망을 하얗게 지우기를 바라는 기도.


어느덧 내 심장이 발바닥에서 뛴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많은데 말이다. 갈아신지 못한 양말 속은 땀이 끈적하게 내 발가락을 움직이게 한다. 오늘 글은 어제 신은 양말 속 발가락이 사람의 땀내를 풍기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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