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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경제 "LG유플러스 용서 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의 열악한 노동실태 고발하고 떠난 아들, "버스노동자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문주현( jbchamsori@gmail.com) 2014.11.1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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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유플러스 전주 고객센터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회사의 부당한 노동 실태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담은 유서를 남겼다.


“정말 이 힘든 구덩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런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냥 모든게 다 싫어서 내려놓고 싶네 이제... <중략> 근심 걱정이 있어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힘드네. <중략> 건강하세요 아버지...”


지난 달 21일 LG유플러스의 노동 실태를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주 고객센터 소비자보호팀 상담팀장 이명수(가명, 30)씨가 아버지에게 남긴 유서다.


12일 오후 익산시 용동면 한 농촌마을 자택에서 명수씨의 아버지 이종민(57)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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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유플러스 고객센터의 부당한 노동실태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떠난 아들. 이종민씨는 집안에 유일하게 남은 가족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죽기 5일 전이었어요. 벼 타작을 해야 하니 주말에 고향집으로 오라고 했죠. 아들이 주말에 오겠다는 말을 듣고 끊었어요.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익산시 용동면 한 농촌마을은 고인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넓은 들판에서 명수씨는 씩씩하게 자란 것으로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다. 성인이 돼서 체육과를 졸업한 명수씨는 야구클럽 활동을 즐기는 건강하고 붙임성 좋은 친구였다. 약 3,500평의 벼농사도 명수씨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명수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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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가명)씨가 나고 자란 고향 익산시 용동면은 너른 들판이 많다. 명수씨는 이 곳에서 뛰어 놀며 건강하게 성장했다.


“민주노조 치열한 투쟁, 아들은 든든한 응원군이었습니다”


아버지 종민씨는 익산 시내버스 기사다. 올해로 19년차. 벼농사는 버스기사 박봉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시작했다. 당장 내년부터는 환갑을 바라보는 아버지 종민씨가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한 달 월급 150만원 수준의 버스기사. 전주와 더불어 익산은 대중교통시책평가에서 꼴찌를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그만큼 노동조건도 형편없다.


“작은 사고라도 나면 그 책임을 제게 묻고 징계를 내렸어요. 지난 19년 동안 중 한 1년을 징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민주노조를 2012년 11월 동료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임금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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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씨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실태에 맞서 4년 가까이 투쟁하고 있는 버스노동자다. 아들은 종민씨에게는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이종민씨의 월급 명세서


한창 전주에서 버스노동자들이 체불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던 2012년. 우리도 민주노조를 건설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아버지 종민씨는 동료와 함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북지역버스지부에 가입했다. 동료는 해고됐고, 종민씨는 스페어 기사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 사측의 탄압을 버틴 지 4년 이제는 조합원이 10명으로 늘었다. 지난 4년 동안의 마음고생, 종민씨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든든한 응원이 컸다.


“명수 때문에 버틸 수 있었어요. 이제 희망도 사라졌어요. 제가 힘든 길을 간다고 하니 불평 없이 제가 하는 일을 응원했습니다. 재작년과 올 초 버스파업이 전주에서 한창일 때. 전주 버스노동자들이 자기(명수씨) 회사 근처를 행진하면, 내 생각이 났던지 행진 대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던 모양이에요. 아빠, 나 지금 행진하고 있어라고 전화하던 명수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전주 버스파업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을 만나면 적극 항변을 하기도 했다. 노조가 뭔지 잘 모르는 청년이었지만, 4년 가까이 거리에서 고생한 전주 버스노동자들에게서 명수씨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던 명수씨는 말없이 버스노동자들의 행진을 따라가며 힘이 되고 싶어했다.


“제가 너무 못나서 아빠 짐을 덜어드리기는 커녕 평생 짐만 얹혀드리고 살아왔네요. 제가 없이 이제 무슨 낙으로 사실지 모르겠지만 항상 행복하세요” <고인이 아버지에게 남긴 유서 중 일부>


아들이 남긴 유서를 손에서 놓지 못한 종민씨는 순간 눈물을 보였다.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어요. LG라는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너무 좋아했고, 편한 줄만 알았어요”


“아들 죽인 LG유플러스, 사죄 한 마디 없다”


든든한 응원군을 잃었다. 외롭다는 아들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박혀 아프다. LG유플러스에도 종민씨의 버스회사처럼 민주노총이 있었다면, 노조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버지는 민주노조를 얻었지만, 아들을 잃었다.


“아들이 입사하고 부장까지 달면 50세 정도까지 일 할 거라고 즐거워했습니다. 11개월 만에 팀장을 달았어요. 그만큼 성실했어요. 그런데 워낙 착한 아이여서 아빠 걱정할까봐 한 번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명수씨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 노동부에 LG유플러스의 부당한 노동실태를 고발해달라는 부탁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 앞에 사죄 한마디 없는 LG와 고객센터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종민씨의 마음이다.


“명수 장례식이 끝나고 부의함을 열어보니 LB휴넷(LG유플러스 고객센터 협력업체) 이름으로 50만원이 든 봉투가 있었습니다. 연락 한 번 없었습니다. 단 한마디의 사죄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해고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JTBC 뉴스룸은 지난 6일 보도<http://news.jtbc.joins.com/html/038/NB10633038.html>를 통해 종민씨가 회사를 6개월간 그만둔 사연을 알렸다. 이른바 악성민원인의 전화를 처리하는 부서에 근무하던 명수씨는 지난 4월 6시간에 가까운 악성민원인에게 시달렸다. 그 민원인은 고객센터에 명수씨의 해고를 요구했고, 명수씨는 책임을 지고 그만뒀다. 


명수씨는 그 후, 여행도 하며 힘든 상황을 극복하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월 다시 복귀한 명수씨는 미래를 부정하며 세상과 이별을 선택했다.


LG유플러스는 홍보팀을 통해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한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유언장 내용은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와 무관한 내용들이 있는 등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조사를 통해 문제점이 발견된다면 개선토록 권고하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었던 노동부, 믿음을 벌써 져버렸어요”


회사에 복귀하고 1주일 만에 죽음을 택한 명수씨는 죽기 전 노동부에 고발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


“수많은 인력의 노동착취와 정상적인 금액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규근무시간은 09시부터 18시입니다. 허나 상담직원들의 평균 퇴근시간은 19시 30분~20시...늦게는 22시에 퇴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추가근무수당이 지급되어야 하나 절대 지급하는 일이 없습니다” <고인이 노동부 고발을 부탁하며 남긴 유서 중 일부>


목표건수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도 할 수 없었다. 고객의 해지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사실상 해지를 방어하는 부서였다는 내용도 언급했다. 고객센터지만, 가입 후 피해를 본 고객에게는 눈 감는 일도 빈번해 소비자 피해도 급증한다고 고백했다.


12일 청년유니온은 LG유플러스 서울 고객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에 대해 노동부의 조사를 촉구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노동부를 찾는다. 이름부터 노동이 들어간 이 행정기관이 노동자들의 설움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죽음을 택한 명수씨도 마찬가지. 아들의 유언이었지만, 못난 아비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종민씨도 마음은 같았다. 그리고 진정서를 접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고인과 아버지의 희망은 노동부 문턱에서 무너졌다.


“진정서를 접수하려고 노동부 전주지청 민원실을 찾았습니다. 접수를 받은 담당자가 유서를 자세히 읽어보더니 증거로 채택이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먼저 하더군요. 유서에 이름이 없어서 증거 채택이 힘들다는 겁니다. 아니 유서가 무슨 계약서입니까? 제가 그럼 필적감정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그것은 민사 소관이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회사에서는 유서 내용에 대해 관련이 없다고 할 것이니 힘들다는 이야기인데, 노동부가 할 말인가요?”


당시 민원을 접수한 담당자는 “유서 내용을 증언해야 하는 당사자(명수씨)가 없고, 유서가 전부여서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뜻을 설명드린 것이다. 조사하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린 것이지 유족들에게 상처를 드리려 한 것은 아니다. 상처를 받으셨다면 정말 죄송하다”라고 해명했다.


한 가닥 희망마저 무너진 기분, 그렇다고 아버지 종민씨는 이 문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아들의 마지막 부탁만큼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LG유플러스의 사과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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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가명)씨가 어렵게 모아 구입한 차. 그가 삶과 이별한 공간이다.


집을 나서자 명수씨가 번개탄을 피워 죽음을 택한 장소인 차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아래 있었다. 하얀 차는 작년 12월 명수씨가 어렵게 모아 구입했다. “드디어 인수완료, 사고 없이 잘 타자!!! ㅎㅎ”라며 자신의 SNS에 자랑도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만이 가득했던 한 때, 명수씨는 1년 뒤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서는 예견하지 못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돈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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