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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법의 잔인함

[칼럼] 익산 동물복지농장 닭들을 위한 변론

송기춘(전북평화와인권연대 공동대표)( jbchamsori@gmail.com) 2017.05.03 20:05

1. ‘인간 중심’ 법의 한계


얼마 전 뉴질랜드의 황거누이 강의 법인격을 인정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고 소식이 보도된 바 있다. 이 강에 인간과 같은 법적 인격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강의 보전에 관하여 마오리족과 정부의 대표가 공동으로 그 권리를 대행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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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가누이강 <뉴질랜드 관광청 홈페이지>

강을 위하여 상당한 액수의 예산도 사용된다고 한다. 이 법률안의 의회 통과는 마오리적의 오랜 숙원이 해결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법률안은 어쩌면 “강은 강으로 흐르게 하라” 또는 “강을 함부로 파헤치지도 물길을 돌리지도 마라”는 뜻으로 읽힌다. 산이나 강을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이 보는 안목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이것은 애니미즘이라는 종교적 사고나 생활방식과 통하는 구석도 있지만 반드시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산이나 강을 살아 있는 존재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존재하는 것과 달리 법학에서는 ‘인간 중심’이라는 확고한 원칙이 법 영역 전반에 자리잡고 있다. 인본주의(人本主義)라 할까. 법적으로는 산도, 강도 사물일 뿐, 인격과는 거리가 멀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간혹 ‘석송령(石松靈)’이라는 나무에게 세금이 부과된다든지, 사람이 사망하면서 자기가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와 개에게 유산을 증여하는 유언의 효력에 관하여 민법연습용 사례가 등장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피소드 정도의 의미로 여겨진다.

‘도롱뇽’도 법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다(대법원 2006. 6. 2. 선고, 2004마1148 결정[공사착공금지가처분]). 석송령에게 세금이 나오고 이 나무 이름으로 장학금이 지급된다고 해도 이 나무가 법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석송령’이라는 것은 일종의 법인격 없는 재단의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이 철저하게 인간을 중심으로 법적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인간 중심’의 사고가 깊이 자리 잡은 탓이다. 사람은 독립된 개인이며 신으로부터도 해방된 존재이다. 세상의 중심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만이 주체가 되고 그 외의 사물과 현상은 주체에 대하여 객체일 뿐이다.

자연과 인간 이외의 생명을 객체로 여기는 사고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기여하고 산업발전에도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고의 결과는, 우리가 목도하듯이, 자연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이다. 이러한 문제를 겪은 곳에서는 동물이나 자연에 관하여 법인격을 인정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인간 중심의 법주체론의 확고한 법학적 틀은 변함이 없다. 도롱뇽은 소송을 청구할 수 없고, 동물은 보호의 대상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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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검출되지 않은 참사랑 동물복지농장. 행정당국은 인근에 AI가 발생한 것을 이유로 '살처분'을 명령했다. 5개 종단협의회는 행정당국의 예방적 살처분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전북환경운동연합>

2. 모든 생명은 귀하다.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이나 지배의 대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근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과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자연은 사람을 품어주는 어머니도 아니고, 신비한 그 무엇도 아니다. 다만 무생물인 지질이나 숲 등일 뿐이다. 또한 동물들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이용할 물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지고 잘리고, 말 못하는 짐승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물건은 값어치가 없어지면 과감하게 버려진다. 병든 동물이나 병이 들지도 또는 전염될지도 모르는 동물은 살처분의 대상이 되고 죽여진 채 또는 산 채로 땅에 매장된다. 동물의 피가 땅을 적시고 있다. 요즘은 까치 때문에 귀한 과실 농사 망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과수원에 철망을 씌우고 폭발음을 낸다. 나방은 전기그물망에 태워진다. 날벌레가 전기에 감전되어 튀는 소리가 끔찍하다. 공원에는 벌레를 유인하여 환풍기 속을 통과하게 하여 ‘박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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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부터 예찰지역으로 전환하면서 참사랑 농장은 계란 출하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진 제공 - 전북환경운동연합>

철저히 개발의 대상이 되고 상품이 된 자연과 생명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이러한 자연관은 현대의 과학세계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또한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이 그로부터 함께 오는 것은 아닌가? 이미 무분별한 개발에서 비롯된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고, 동물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은 사람들의 생명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지구상에서 유일한 강자인 인간은 영원히 다른 동물과 생명을 지배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면,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생명에 대해 아파하고 아끼는 마음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 위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 하여 결코 가벼이 해치지 않았다.

예로부터, 감을 딸 때도 몇 개는 남겨 두고 흘린 이삭도 샅샅이 거두지 않는다 하였다. 쥐를 위하여 밥 한 덩이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불을 켜지 아니한다(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고도 하였다. 콩을 심으면, 하나(또는 1/3)는 하늘 나는 새를 위해, 하나(또는 1/3)는 땅에 사는 벌레를 위해, 그리고 하나(또는 1/3)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뜨거운 물을 함부로 수채에 버리지 말라는 말씀도 들었다.

법률상으로는 소유자가 물건의 사용, 수익, 처분의 권능을 가진다 하지만,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여러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임을,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생명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어진 마음이 담긴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선인들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라는 말씀도 단지 의젓한 걸음걸이만을 가르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발 아래 깔리는 생명을 걱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런 얘기들은 세상에 사는 온갖 생명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쳐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또는 법률에 의해 요구되고 있다는 이유로 자연은 파헤쳐지고 생명은 물건으로 취급되어 버려지고 땅에 파묻힌다. 몇 년 전 돼지의 살처분(실제로는 ‘살’처분이 아니라 생매장이었다) 현장을 전하던 동영상의 장면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연약한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람의 어진(仁) 바탕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느덧 이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들만 모여 사는 세상에서 아무 뜻도 없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을 나누고 인간 아닌 것에 대해 천시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구분하여 어떤 부류를 차별하는 마음이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행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경시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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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생명에 대해 경외와 존중을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경외와 존중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사람이 편하자고 파헤치고 깎고 다듬고 하는 일이 인간의 삶까지 파헤치지 않으려면, 이것이 적어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인간의 풍요를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희생되는 이름 모를 생명의 죽음 앞에서 경건하여야 한다.

‘찬란한’ 음식을 앞에 두고 오로지 맛을 즐기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잔인한’ 의식이다. 이 땅에는 인간인 지배자, 그리고 강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동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삶의 환경은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물을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사고는 식물이나 나아가 자연에 대해서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설사 자연이나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인 관점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인간의 삶의 환경이나 인간의 삶 자체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가축 살처분과 보상금

작년부터 조류인플루엔자가 확산되면서 지금까지 살처분된 닭이 3천만 마리를 넘는다고 한다. 가축 살처분은 가축전염병예방법에 의한 조치이다. 가축전염병 예방법(시행 2017.3.30. [법률 제14113호, 2016.3.29.]) 제20조(살처분 명령) 제1항에서는 “시장·군수·구청장은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제1종 가축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축전염병에 걸렸거나 걸렸다고 믿을 만한 역학조사·정밀검사 결과나 임상증상이 있는 가축의 소유자에게 그 가축의 살처분(殺處分)을 명”하여야 하지만, “우역, 우폐역, 구제역, 돼지열병, 아프리카돼지열병 또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렸거나 걸렸다고 믿을 만한 역학조사·정밀검사 결과나 임상증상이 있는 경우에는 그 가축이 있거나 있었던 장소를 중심으로 그 가축전염병이 퍼지거나 퍼질 것으로 우려되는 지역에 있는 가축의 소유자에게 지체 없이 살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렸거나 걸렸다고 믿을 만한 역학조사, 정밀검사 결과나 임상증상이 있는 경우는 ‘예방적’ 살처분까지 가능하다. 살처분한 가축의 소유자에게는 보상금과 생계안정비용을 지원한다. 가축전염병예방법 시행령의 별표2에서는 “법 제20조제1항 및 제2항 본문(법 제28조에서 준용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이하 이 표에서 같다)에 따라 가축을 살처분한 경우: 살처분 당시의 살처분한 가축의 평가액(이하 "가축평가액"이라 한다)의 전액”을 보상금으로 지급하지만, “법 제48조제3항제3호 및 이 영 제11조제4항에 따라 구제역ㆍ돼지열병ㆍ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ㆍ브루셀라병(소의 경우만 해당한다) 감염가축이 발견된 농가에 대해서는 살처분일을 기준으로 가축평가액의 100분의 80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한다고 하여 일정한 경우 보상금을 감액하고 있다.

이처럼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이 살처분으로 인하여 입는 손해에 대해서는 살처분 당시의 평가액을 모두 보상하도록 함으로써 ‘재산상’의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머지않아 가축을 출하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까지는 보전되지 않으며, 보상을 위한 손해액의 평가가 적절하게 이뤄져야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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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 농장주가 닭들의 건강함을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전북환경운동연합>

4. 익산 ‘참사랑 동물복지농장’의 닭소리

얼마 전 전북 익산시 망성면 '참사랑 동물복지농장'의 주인 유항우(50)씨는 익산시장을 상대로 살처분명령의 집행정지를 신청하였다. 참사랑 농장은 동물복지 기준(1㎡당 9마리)보다 넓은 계사에 닭들을 방사하고 친환경 사료와 영양제를 먹여 친환경인증과 동물복지인증, 해썹(식품안전관리 인증)을 받았으며, 익산시 농축산물브랜드인 '탑마루'를 붙여 최고급 계란을 공급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3월 5일 이 농장으로부터 2.1㎞ 떨어진 육계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 이 농장의 닭이 살처분 대상에 포함됐으며, AI 확진 농장에서 반경 3㎞ 안에 있는 16개 농장의 닭 85만 마리는 모두 살처분됐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지법 제2행정부는 "소명자료에 나타난 모든 사정은 참작하더라도 신청취지 기재 처분이 집행될 경우 신청인이 입게 될 손해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금전으로 보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거나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그 집행 또는 절차를 정지할 긴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청을 기각하였다.

이 농장에서 닭을 기르는 유씨가 살처분에 대해 저항하게 된 것은 단지 재산상의 손해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산상의 손해야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상당 부분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닭을 단지 살처분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복지’를 생각하면서 닭을 치는 사람에게 닭이 어찌 물건에 불과하겠는가? 하지만 가축전염병예방법 등은 가축을 물건과 달리 대우하고 있지 않다. 과연 그래야 하는가? 어쩌면 유씨의 집행정지 신청은 동물에 대한 법적 대우의 변화를 구하는 작은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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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적 살처분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참사랑 농장주와 함께 농장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사진 제공 - 전북환경운동연합>

5. 동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독일의 동물보호법(Das Tierschutzgesetz)에서는 인간은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동료(Mitgeschöpf)로서 그들의 생명과 복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1 TierSchG, Grundsatz)고 하고 있고, 민법에서도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BGB §90a)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헌법(기본법 §20a)에서도 동물보호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주의 헌법에서도 동물을 인간의 동료(또는 동반자, 반려)로 표현하고 있다.

스위스헌법(제80조)에서도 1) 동물의 보호 및 취급, 2)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실험과 개입, 3) 동물의 이용, 4) 동물 및 동물제품의 수입, 5) 동물의 거래 및 수송, 6) 동물의 도살에 관하여 연방에 대해 특별히 법률을 제정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처럼 법제에 따라서, 이제 동물은 물건이 아닌 것으로 대우되고 있다. 그리고 법률의 근거가 없더라도 살아 있는 동물을 생명체 아닌 사물과 달리 대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아무리 인간 이외의 사물을 법적으로는 다 같이 취급한다고 해도 그 사물의 성질과 내용에 따라 달리 취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도 제한적인 것이긴 하지만 동물보호법도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지 않는가? 동물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가축전염병이 퍼질 위험이 있다고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닭을 예외 없이 죽이는 방식의 예방법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아니 물건이라고 해도 그 성질에 따라 달리 취급하는 것 아닌가? 물건에 대해서도, 그것이 위험하다고 하면 그 위험의 정도를 측정하고 그 정도에 따라 달리 취급하지 않는가?

심지어 재산권에 대한 제한을 가한다는 관점에 선다 해도, 재산권에 대한 제한은 그 필요성에 비례하여야 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서도 덜 제한적인 수단이 있다면 덜 제한적인 수단을 놔둔 채 더 제한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재산권의 침해에 이르게 된다. 케이지식으로 과밀입식을 하는 농장의 닭이나 넉넉한 공간에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농장의 닭이나 똑같이 전염의 가능성이 같다는 전제로 모두 살처분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마땅한 것은 아니다. 2년 전에도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많은 조류 가축이 살처분된 바 있는데, 살처분된 닭 가운데 60%는 감염되지 않는 닭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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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한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동물의 문제는 생명체인 동물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동물을 하찮게 여긴다면,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사람을 어찌 사람대접 하겠는가? 동물이 겪는 아픔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런 마음이 어찌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던 선조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쩌다가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덧붙이자면, ‘살처분’에 참여 또는 동원된 사람들의 고통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이제껏 닭 한 마리 잡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살처분을 했다. 살처분을 담당한 공무원만으로 닭과 오리 등 몇 천만 마리를 몇 달 사이에 ‘살’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 시간에 그게 매뉴얼대로 되었을 리도 만무하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아다가 산 채 웅덩이에 던져 넣고, 살아 움직이는 것을 파묻고 아우성 소리를 들었으니 그 고통스러운 소리가 어느 세월에 잊혀질까?
익산 동물복지농장의 닭에 대한 살처분 명령과 이에 대한 집행중지의 요구는 우리에게 동물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동물을 단순한 물건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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