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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할매의 전쟁, 우리들의 밀양

<밀양을 살다>서평

박슬기( jbchamsori@gmail.com) 2014.06.10 21:02

할매는 잠꼬대를 했어요. "안돼, 안돼!" 자면서도 한전과 싸우고 있는 할매. 꿈속까지 침탈당한 이 징그런 전쟁도 어느덧 9년째라니요.

밀양 송전탑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농성장 움막은 마치 우리 외갓집마냥 아늑했습니다. 할매가 차려주신 밥상에는 직접 뜯어 무쳐주신 파릇한 나물들이 가득. 밥 한 그릇을 고봉으로 뚝딱 비웠는데도 더 먹으라 권하시는 것도 우리 외할머니랑 어쩜 똑같지요. 움막을 빙 둘러 심겨있는 꽃밭을 거닐며, 그 소박하고 간절한 평화에 대해 한참 생각하다가, 움막에 돌아와 누우니 문득 책 한 권이 보였습니다. <밀양을 살다>. 밀양 할매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책. "할머니, 여기 할머니 사진도 있네요?" 하고 여쭈니 "이뿐 할매들 찍어야지 어째 나를 찍어갔어, 뭐 볼 거 있다고."하며 돌아앉으십니다, 수줍은 천상 소녀처럼.

왠지 서글픈 마음이 되어 엿보듯 슬며시 책장을 넘겨봤습니다. 일제시대 처녀들을 다잡아간다 해서 부랴부랴 얼굴도 못 본 남자에게 시집왔던 그날부터 줄곧 살아온 할매의 집. 나무 팔고, 감 내고, 콩 내고, 쌀 내고, 돌아보면 몸서리쳐질 만큼 고된 세월 속 그렇게 한 마지기씩 일군 땅. 휠체어를 타고 와서는 걸어 다니고, 어디를 가든 나물이 지천이고 솔 냄새 칡넝쿨 냄새가 푹신푹신한 세상 최고의 병원 화악산. 아무도 없이 두렵고 외로운 밤에도 서로를 품고 함께 자며, 가족보다 진한 정을 나눠온 마을. 할매들의 삶, 할매들의 사랑이 조곤조곤 풀어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울다가, 웃다가,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그래요, 지금 할매들은 전쟁 중입니다.

그 고된 시집살이도, 치마를 덮어쓰고 도랑에 뛰어내리려 했던 혹독한 가난도, 왜정도, 대동아전쟁도, 6.25 전쟁도, 오만 전쟁을 다 겪어온 할매에게조차도, ‘지금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래요. 할매가 그토록 묵묵히 일궈온 모든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려 하는, 전쟁. 밤낮도 없이 헬기가 뜨고 사람들이 쳐들어오는 통에 쉬이 잠들 수 조차 없이 종일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저 노인네들을 잡아다 불싸질러 버려야겠다”는 폭언을 들으며, 폭행하고 칼부림하고도 나몰라라 잡아떼는 경찰들에 맞서 싸워온 전쟁. ‘다같이 겪어야 했던 역사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힘없는 할매들을 콕 집어 짓누르는 폭력과 맞서야 하는’ 전쟁. 설움이 북받쳐 목놓아 울어도 힘 가진 자들은 들어주지도 않는 한 맺힌 전쟁. 그러나 일평생 일궈온 할매의 감나무밭도, 염소도, 손주손녀들도 살 수 없게 되는 송전탑을 막고자 오늘도 할매가 지팡이를 짚고 나서는 까닭은, 비단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슴이 짓눌리듯 먹먹해져서 잠시 숨을 골라야 했습니다. 저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너무도 절박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곤 다 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마음이란. 아무리 버둥거리고 울부짖어도 어찌할 도리조차 없이. 그저, 세상이 무너진다, 랄 밖에요. 실은, 전 그래서 밀양에 갔었어요. 할매들의 삶이, 그 신난한 굴곡 속에서도 말간 웃음을 지켜온 소박한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었어요. 하물며 경찰이, 한전인부가, 그 삶을 무참하게 짓밟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작 할매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당신들의 삶만이 아니었습니다. 할매들이 목숨을 내걸고 지키고 있던 것은,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야 할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할매들이 나무를 껴안고 베지 못하도록 버티고, 포크레인 바가지 속에 들어가서 공사를 막고, 마지막 수치심마저도 내던지고 알몸으로 경찰과 인부들을 막아선 것은, 이 어르신이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은, 한 명이 죽는 것으로는 안되겠다, 유 어르신마저 농약을 마시고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싸우려 했던 것은, 밀양을 지나는 765KV 고압 송전탑이 바로 새로이 짓는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보내는 길이 되기 때문이래요. 더 이상의 원전은 안된다, 썩은 땅을 물려줄 수가 없다, 하셔서래요. 손주 손녀들, 이 땅을 살아갈 우리들에게, 이 아름다운 밀양을, 이 살기 좋은 보물 같은 땅을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랍니다. 핵쓰레기와 핵발전으로 망가져버린 땅에서, 그 위협 속에서 살게 할 수가 없어서랍니다. 할매들의 목숨으로 우리를 지켜주고 싶어서, 랍니다.

밀양을 떠나 돌아오는 날, 할매는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에 쇠사슬 걸고 싸우는 건 우리가 할 거야, 너희는 지켜봐야 한다. 너희를 위해서 싸우는 거야, 우리야 이렇게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너희는 어쩔꼬, 땅이 다 썩는다, 살 수가 없어, 너희가 꼭 지켜봐야 된다." 그 이야기가 책 곳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도, 이 짧은 글조차 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가슴을 휘휘 도는 말들이 아파서 쉬이 붙잡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서, 이것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할매들의 싸움이 아니라고. 이것은 밀양의 싸움이 아니라고. 우리들의 미래를, 우리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우리들의 싸움이라고. “우리 모두가 밀양”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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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슬기 님은 밀양 송전탑 저지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고 있는 시민입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를 위해 설치한 주민들의 농성장과 움막 등에 대해 밀양시청은 11일 06시를 기해 행정대집행을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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