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교사,다시 한 걸음 앞으로

김현규( icomn@icomn.net) 2020.09.27 18:17

제가 사용하는 SNS에 <추억 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이나 그 어느 해의 오늘 올렸던 글과 사진을 다시 보여주는 기능인데요. 거기 올라온 옛날 사진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4학년이었던 2004년 봄에 사범대학 벚나무 앞에서 후배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많은 추억이 깃든 공간과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지난 날의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현실적이기보다는 좀 이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할 수 있는 것>이나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에 쏠려있던 이상가였던 것 같습니다. 물불 안 가리며 무모했지만 그래도  높은 이상을 향해 몸 던지던 노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하여 사진 속의 대학생을 기특하게 바라봤습니다.

교사가 가진 수업, 생활지도, 상담, 진로진학지도 역량이나 그밖에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말과 행동 등의 폭과 깊이는 교사 개인의 삶과 분리해서 볼 수 없습니다. 즉, 교사는 교육 주체이자 교육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가 수업을 기획하고 준비하여 진행합니다. 그러면 수업을 참관한 분께서 이런 수업을 준비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말하죠. <제 일생이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수업은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현란한 기술로 풀어내는 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실에서 교사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온 학생들을 만나고 교사가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의 틀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그 다음 자세히 관찰하고 대화하고 고민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김춘수가 <꽃>에서 노래했듯이 <하나의 몸짓>이던 학생들이 교사에게 다가와 비로소 <꽃>이 됩니다. 그리고 학생들 역시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으로 교사를 부를 때 교사도 학생에게 <꽃>이 됩니다. 이것이 아마도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던 서로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현실 속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서른 명 가까운 학생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사실 어렵습니다. 수업과 조회 · 종례 시간으로는 부족하니 수시로 학생 개별 상담과 비대면 학부모 상담을 하지만 모든 학생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학생을 잘 이해하고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학습유형 및 진로상담 전문가 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위기 청소년을 도와주고 싶어서 위기상담을 공부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적용해 보았지만 모든 학생을 다 도울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네 번은 기다리고 세 번 울고 두 번 화내고 한 번 웃었던 것 같습니다.

어제는 교실에서 어떤 방법을 다 써도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 보며 막막한 공포에 질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갖은 애를 쓰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학생과 학부모, 교장 선생님께 비난을 받기도 했고 지시를 따르지도 않고 제멋대로 구는 등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상대하다가 분을 참지 못해 엎드리게 하고는 엉덩이를 다섯 대씩 때리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학생 활동 중심 수업을 준비하여 수업에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고 하기 싫다며 책상에 엎드렸습니다. 일부는 야유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악몽을 꿀 만큼 교실은 교사에게 막막함과 좌절, 공포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교사는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합니다. 물론 이걸 교사만 하는 건 아니지요. 많은 교육 관련 연구자들이 교육을 연구합니다. 그러나 교실 현장에서 학생을 자세히 살피고 고민하고 교육을 실천하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육에 대해 말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주체는 교사라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수많은 고담준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이 잘못됐다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미래를 준비하는 역량이 부족하다며 호통치고 개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교실 현장에서 학생들이 어떤 모습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생활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왜 표정이 시무룩한지, 점심을 안 먹으려고 하는지, 연락도 없이 자꾸 지각을 하는지, 같이 잘 어울리던 친구와 서먹서먹해 하는지,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학생과 끈기 있게 대화하고 함께 고민해준 적이 없습니다. 수업 시간에 졸리지도 않은데 왜 자꾸 엎드리려고 하는지, 학생 지도하는 선생님께 왜 소리를 지르고 대드는지, 왜 선생님 말꼬투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수업을 방해하는지 선생님과 이야기하기 싫다고 외면하는 학생을 붙들고 달래고 위로하고 공감하며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 교육이 변해야 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교육 문제가 변화를 싫어하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기득권 교사들이 버티기 때문이라고 하면 좀 속상합니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던 2004년의 국어교육과 4학년 학생은 이제 현장에서 16년을 보낸 중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야학에서 역사 수업 시간에 <장보고>가 사람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몰라 수줍게 질문하던 아주머니 학강의 질문을 받고 기초부터 더 차근차근히 가르쳐 드리지 않은 무신경함에 미안해하며 펑펑 울던 강학은 중견교사가 되었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프란치스꼬 성인을 따르는 수도자가 되기를 바라던 청원자는 매년 학교를 옮겨야 하는 기간제 교사 자리를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방랑을 본받는 것으로 받아들여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한 일이 터져도 놀라지 않고 행정 서류가 날아와도 척척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선생님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단에 오르던 첫마음을 떠올립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고 싶다던 기도를 다시 올립니다. 두려움과 속상함을 뒤로 하고 교사로서 나 자신과 학생의 성장을 위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8830f240ee1b30cbf53c75381fc56f65.jpg

<김현규 : 오늘도 학교에서 학생들과 지지고 볶으며 가르치고 또 배우며 사는 교사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