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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결사(結社)에서 보는 한국인의 공동체적 지향성

향도·동계·협동조합 이야기

김성순( icomn@icomn.net) 2021.02.27 14:29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칼럼 보낼 때 됐다는 편집간사님의 문자메시지를 받고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의 주제를 고민하다가, 수년 전에 썼던 한국의 ‘결사(結社)’를 주제로 하는 논문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듯 다시 들려주기로 했다. 내가 주로 연구하는 결사라는 것이 대부분 신앙결사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불교결사인 향도(香徒)와 더불어, 조선시대 향촌민들의 조직이었던 동계(洞契)와 근현대의 결사체인 협동조합까지 함께 얘기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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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협동조합 로고들)

결사란 “지향과 실천을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특정 목표를 정하여 결성한 공동체”라고 간단하게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결사 중에 가장 먼저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는 향도는 어떤 목표를 정해서 모여 실천했던 조직이었을까? 『삼국유사』 권5 <욱면비염불서승조郁面婢念佛西昇條>에는 욱면이라는 종이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사람들과 함께 1만일 동안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하다가 주인보다 먼저 하늘에 올라서 미타정토에 갔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그때 주인이 다른 이들과 함께 모여 염불했던 그 모임이 바로 향도이다.

향도라는 용어를 해석해보면, 향기 향(香), 무리 도(徒), 즉 향을 피우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로서, 결사의 모임에서 향을 사르며 염불을 했으리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9세기 이후에는 향도의 숫자가 점점 늘어서 각 지역 군현마다 향도 조직이 존재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숫자가 곧 힘이요, 돈이라 점차 불상이나 불탑을 세우고, 절도 세웠다. 또 한 가지, 한국의 향도가 실천했던 중요한 신행 중의 하나가 바로 향목을 묻는 ‘매향(埋香)’이었다. 그들은 향목(香木)을 계곡물과 해수가 만나는 갯벌 속에 긴 세월 묻어두면 침향(沈香)이 만들어지리라 믿었다. 56억 7천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회를 세 차례 열게 되면 침향을 캐서 법회를 장엄하리라 결의하고 곳곳에 향목을 묻고 매향비에 글을 새겨 미래생의 구원을 발원했다. 아직 숨어 있는 매향비도 있겠지만, 현재 드러난 것만도 삼일포, 입암리, 암태도, 안국사, 효교리, 맹진리, 흥사리, 엄길리, 해미리, 덕암리 등 전국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신앙적 에너지가 넘치던 결사조직인 향도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신앙을 매개로 한 사적인 모임 정도로 성격이 변해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향도가 지역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촌락민들의 상장례를 함께 치러주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초상이 나면 이웃들끼리 물자를 추렴해서 장례를 치르고, 품앗이하듯 서로 상여를 매는 일을 했다가, 나중에는 민간의 상조회사 같은 역할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17세기 이후에는 이 향도가 장례용역의 의미인 ‘상두꾼’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16세기에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해 향촌에 도입된 향약(鄕約)은 기존에 향도 조직이 주관했던 일들까지 디밀고 들어오면서 동계(洞契)나, 촌계(村契) 등의 조직이 자리 잡게 된다. 글 서두에서 정리했듯이, ‘구성원들이 특정 목적을 정하여 결성한 공동체’가 결사이므로 이들 동계나 촌계 역시 결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향도가 주로 촌민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결성하고 유지되었던 조직이었던 반면에, 동계는 16세기 이후 동리(洞里) 단위에서 사족들의 주도 하에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던 마을자치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계의 규약을 어기면 누구나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는 것인데, 바로 여기서 지방 사족의 힘이 공적인 법체계를 넘어서 발휘될 소지가 있었다고 하겠다.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는 사족들만의 리그인 상계(上契)와 촌락민의 조직인 하계(下契)가 함께 참여하는 상하 합계(合契)의 형식으로 동계가 운영된다. 두 차례의 큰 전란으로 조선의 향촌에서 사족들의 지위도 흔들린 데다가, 소빙기 제1기에 해당되는 시기라 자연재해가 빈발해서 촌민들이 유랑생활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계에 속해 있던 상천민들을 동계의 구성원으로 수용하게 된 것이다.

나름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18·19세기에 이르면 향촌 내에서의 사족들의 지배 리그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동계는 구성원들의 목적에 따라 이리저리 기능이 분화하게 된다. 하계들이 상계의 속박을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마을의 계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자식들 교육을 위한 학계(學契)와 부모님 상을 대비한 ‘상포계(喪布契)’였다. 20세기에, 심지어 21세기에도 한국 사회에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각종 ‘계(契)’들의 뿌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깊다고 하겠다.

향도에서 시작했다가, 동계로 이어지고, 그것이 느슨해지자마자, 다양한 목적계들을 분출시켰던 한국인들의 ‘공동체적 지향성’이 근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 발전했을까? 향도와 동계의 맥을 잇는 지역공동체 겸 현대사회의 상호부조결사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협동조합’이었다.

2012년 1월 26일에 공포된 협동조합기본법 제2조에서는 협동조합을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 생산, 판매, 제공 등을 협동으로 운영함으로써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은 일본의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태동하게 된다. 1907년에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과 통감부의 협의기구에 ‘지방금융조합설립계획요령’이 상정되어 정부 주도적인 정책기구이자, 조합원들이 출자하는 협동조합이라는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관변 협동조합 이후 자생적인 민간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은 대체로 1920년에 설립된 ‘경성소비조합’과 ‘목포소비조합’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원불교 쪽에서는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이 간척사업을 하여 자립적인 생활과 교단의 기반을 마련했던 저축조합(1917)이 한국 최초의 민간주도 협동조합이라고 보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거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던 민간 협동조합운동세력들은 해방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에는 기독신민회 협동조합이 창설되었고, 1946년 3월에는 좌익계통의 협동조합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농업협동조합과 함께 여러 생산자협동조합이 차례로 생겨나서 대부분은 정부정책의 동원체계로 묶이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가톨릭의 신용협동조합이 물꼬를 열어 여러 신협이 결성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하는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대기업과 거대 유통업의 구조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려는 소비자운동, 마을공동체운동, 취미를 생산으로 연결시키는 동호회운동, 육아와 교육, 상조의례, 자가생산물 유통 등 광범위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수많은 협동조합들이 만들어지고, 또 문을 닫기도 하며, 내부적으로는 격렬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초기의 목표와 달라지는 운영 상태를 두고 구성원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하나둘씩 본격적으로 안정 궤도에 들어서는 협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있다.

정리해보면, 향도는 초기에 불교도들이 구원에 대한 발원을 실천하는 장(場)을 제공했으며, 지역사회 구성원들을 결속시키고, 나중에는 장례를 전담했던 조직이기도 했다. 동계는 지방사회의 지배사족층이 상천민들을 성리학적 질서 안에 포섭하는 기능을 했다가, 나중에는 각종 목적계들이 만들어지는 온상의 역할을 해냈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은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소외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확보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결사체로서의 기능을 담지한다.

결국 이 세 사례들을 통해 한국사회에서의 ‘결사’는 개인들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발생하는 과제를 상조하여 해결하고, 사회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직했던 공동체였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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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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