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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간에 대한 권리

성장현( icomn@icomn.net) 2021.03.10 11:53

일흔 노인으로 보인다. 머리가 하얗고, 얼굴엔 잔주름이 있다. 앞에 앉은 중년 남성에게 잔뜩 화가난 목소리로 뭔가를 얘기한다.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세상에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칠 년을 일했는데, 나는 가족으로 생각했다.”

 

일흔은 되 보이는 노인은 독서실 사장님이다. 그 앞에 앉아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중년 남성은 노무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노인의 말에, 중년 남성은 “네”, “네” 연신 맞장구를 친다. 노인의 짜증스럽고 화난 말을 계속 듣던 중년 남성은 가끔 판례를 언급하거나 근로기준법을 얘기한다.

 

며칠 전, 가끔 들르는 카페에서 목격한 모습이다.

 

필자도 노동 분쟁 관련 소송과 상담을 하면서, 사용자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지 아느냐?”라는 말이다.

 

사실, 피용자들은 사용자가 “가족처럼 잘 해주길” 기대하면서 근로 계약을 맺지는 않는다. 사용자는 ‘사용자의 의무’를 다하고, 피용자는 ‘피용자의 의무’를 다하면 된다. 그런데, 위 의무의 이행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법적 분쟁으로 발전하고 급기야는 소송까지 진행한다.

 

송사는 증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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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필자는 사찰의 종무소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근로자를 대리해서 사찰에 못 받은 임금과 퇴직금 등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특이한 것은, 위 소송의 소장을 제출하면서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통은 소장을 제출하면서 원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같이 첨부해서 제출하는데, 위 소송은 의뢰인의 요청으로 증거를 첨부하지 않고 소장을 제출하였다.

 

소송은 결국 증거 싸움이니, 증거를 많이 수집하셔야 한다는 필자의 말에 의뢰인은 ‘설마 스님들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며칠 전 사찰로부터 우리가 제출한 소장에 대한 답변서가 왔다. 우리의 주장을 대부분 부인하는 내용의 답변서다. 의뢰인은 탄식했다. ‘하, 스님들도 이렇게 거짓말을 하네요.’

 

위 의뢰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필자는 또 다른 사건에서는 사용자를 대리하고 있다. 분쟁은 ‘피용자가 손님으로부터 받은 돈을 훔친 것’을 발견한 사용자가 피용자를 해고하면서 시작되었다. 해고된 피용자가 사용자에게 퇴직금 등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사용자는 억울하다. 해고된 피용자가 훔친 돈이 퇴직금보다 몇 배는 많을 거라고 한다. 위 피용자는 다른 곳에서도 손님으로부터 받은 돈을 훔쳐서 해고된 전력도 있다. 사용자는 피용자를 형사 고소하였다. 하지만, 사용자가 확보한 증거는 최근 며칠의 cctv가 전부다. 피용자는 벌금형으로 약식 기소되고 말았다. 역시 증거가 중요하다.

 

요즘은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 ‘위임계약’인지 또는 ‘동업계약’인지 구분하기 힘든 사례들이 많다.

 

자신의 미용실에서 일하던 미용사들이 퇴사해서 새로운 미용실을 창업하자, 미용사들을 상대로 위약금 청구 소송을 진행한 미용실 원장이 있다. 필자는 위 소송에서 미용사들을 대리하였는데, 반소로 ‘퇴직금’ 지급을 구하는 반소를 제기하였다. 미용사들이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대법원은 미용실 원장의 지휘·감독이 인정된다면 미용사들도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따라서 미용실 원장의 미용사들에 대한 지휘·감독이 인정되면 원장은 미용사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

 

학원의 강사들이 퇴사해서 학원을 차리면서 법적 분쟁화 된 사례도 있다. 학원 강사들이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도 대법원까지 가서 다툰 사례들이 많이 있다. 모든 학원 강사들을 근로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학원 원장의 지휘·감독이 인정되면 학원 강사들도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있다. 위 사안에서는 판결까지 가지 않고, 조정으로 학원 원장이 강사들에게 일정 금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가끔 ‘퇴직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일했다’라고 말하면서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용자들이 있고, 근로자도 자신이 퇴직금을 못 받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근로자를 고용하면서 ‘퇴직금을 주지 않기’로 하거나, ‘퇴직금을 월급에 포함하여 분할 지급하기’로 하는 약정은 모두 무효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도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퇴직금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

 

또한, 기본급에 ‘수당’까지 포함하여 지급하기로 하는 약정을 체결하였다는 이유로 야간 수당, 휴일 수당 등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포괄임금제 약정은 원칙적으로 무효이고, “감시·단속적 근로 등과 같이 근로시간, 근로형태와 업무의 성질을 고려할 때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 기본임금을 미리 산정하지 아니한 채 법정수당까지 포함된 금액을 월급여액이나 일당임금으로 정하거나 기본임금을 미리 산정하면서도 법정 제 수당을 구분하지 아니한 채 일정액을 법정 제 수당으로 정하여 이를 근로시간 수에 상관없이 지급하기로 약정하는 내용의 이른바 포괄임금제에 의한 임금 지급계약을 체결하더라도 그것이 달리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없고 여러 사정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인정될 때”에 한해서 유효하다.

 

시간은 가장 공평하다. 부자든 가난하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유한한 삶에서 타인을 위해 나의 시간을 기꺼이 소비한다면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타인을 위한 삶’에 대한 보상을 규율하고 있는 법이 ‘근로기준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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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현은 법무법인 광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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