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모성애, 양가감정을 받아들이는 능력

[서평] 분노와 애정 (시대의창, 2018)

김경민( icomn@icomn.net) 2021.03.13 12:15

딸이 지난 주 화요일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년 전에 아들이 입학했을 때는 부모들도 모두 강당에 모여 입학식을 함께 본 후, 아이의 교실로 이동해 담임선생님과 인사를 할 수 있었으나 올해는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불가능했다. 딸은 학교 체육관 앞에서 나랑 인사를 하고 혼자 들어갔다. 체구에 비해 큰 책가방을 메고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7년 전 겨울 내 몸에서 태어났을 때, 만지면 부서지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아기가 어느새 저렇게 커서 더 많은 규율과 의무, 평가와 인내가 요구되는 공적 공간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 이런 느낌이 들 때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모종의 당혹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에겐 어쩌자고 뒷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존재가 둘이나 있는 것인가. 나는 스스로를 내 한 몸 책임지고 건사하기도 버거운 사람이라 주제 파악을 하며 잘 살아왔는데 어쩌자고 이토록 감정을 분리하기 힘든, 분리는커녕 간혹 감정이 몇 배로 증폭되기도 하는, 그리하여 때때로 환희 못지않은 고통을 주는 절대적인 타인이 있는 것인가.

 

-----------------------------------------------------

“아이들은 내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격렬한 고통을 안겨준다. 양가감정이라는 고통이다. 나는 쓰라린 분노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더 없는 행복에 대한 감사와 애정 사이를 죽을 듯이 오간다. 가끔 내가 작고 죄 없는 아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이기적이고 속 좁은 괴물을 본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신경을 건드린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요구, 무엇보다도 우직함과 인내에 대한 요구는 나의 부족함에 절망케 하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 운명에 절망케 한다. 분노를 억누르면 나약해진다. 가끔은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서로에게서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한다.”

----------------------------------------------------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에이드리언 리치가 1960년 11월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이 일기는 《분노와 애정》 (모이라 데이비 엮음, 도리스 레싱·에이드리언 리치 외 지음, 김하현 옮김, 시대의창, 2018)의 135페이지에 실려 있다.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분노와 애정》엔 부제 그대로 모성에 대한 16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사진작가인 모이라 데이비는 서른여덟 살에 첫 아이를 낳은 후,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잘 해낼 수 있도록 자극받기 위해, 책 속에서 내가 겪는 경험과 꼭 같은 것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끼기 위해, 죄책감 없이 탁월한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이 책에 실린 16편의 글을 선별해서 모았다.

 

모성이란 뭘까.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나열한다.

---------------------------------------------------------------------

1. “타고난” 엄마는 다른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며, 하루 종일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며, 아이들에게 삶의 속도를 맞추는 사람이다.

2. 엄마와 아이들이 집에 격리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3. 모성애는 이타성 그 자체이며, 그래야만 한다.

4. 아이와 엄마는 서로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다.

(pp. 136~137)

--------------------------------------------------------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이라면 저 가설이 어디까지나 허구임을 잘 안다. 아기의 똥 기저귀 한 번 안 갈아봤을 것 같은 사람들이 엄마들에게 저 가설을 토대로 ‘훈계’를 할 때, 그 훈계의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광경을 목도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제발 좀 닥치세요!)

 

제인 라자르는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모성애가 아닐까.’(p.124)라고 말한다. 실로 그러하다. 나는 내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무고한 내 아이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는 그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잃느니 내가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는 내 삶의 리듬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내 의지를 수시로 꺾는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내 바닥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망가진 삶과 꺾인 의지를 어떻게든 회복하기 위해 나는 매일 고군분투한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인내하면서, 울면서, 웃으면서, (속으로) 분노하면서. 왜 분노를 숨겨야 하는가. 숨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게 무엇이든 숨긴다고 없어질 수는 없다. 억압당한 것은 언제든 돌아온다. 이 세상이 분노를 애정 못지않게 엄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때, 분노가 엉뚱한 대상(아이)에게 비극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118497007_340082617119822_7933429687816926861_o.jpg

 

-----------------------------

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