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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양철학이야기] 3. 역사에서 찾는 강인한 여성들

편집팀( svmanz@hanmail.net) 2002.11.24 09:31

여류시인묵객의 발자취와 위대한 어머니들, 고려와 조선의 강인한 여성들을 만나보자.

4. 고려와 조선의 여인들

여왕까지 만들어낸 신라에 이어서 고려와 조선에서도 여자들에 대한 성적 차별은 지금처럼 강하게 있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존재하였던 것 같다.

우선 여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던 흔적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역사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 및 기록 그리고 유적과 유물로 추정하여 보면 여자들의 이야기가 조선 초기까지는 숱한 여선인(女仙人) 또는 여류 풍수들이 등장하고 있고 나아가 시인 묵객들 속에서 여류시인묵객들의 발자취가 많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위대한 어머니 상으로도 말이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면서 여자들의 역할은 정려문(旌閭門)에 등장하는 열녀 효부의 어머니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4-1. 집안을 일군 여류풍수들이 있었다.

고려말 남원양씨(南原楊氏) 문중을 지킨 양수생의 부인 숙인이씨의 이야기.

전북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는 남원양씨들을 집성촌이다. 남원양씨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남원양씨의 10세조인 양수생의 부인 숙인이씨가 있다. 숙인이씨는 조선시대 들어서 최초로 받은 정려문을 갖고 있다. 원래 시아버지 양이시와 남편 양수생은 고려시대 부자문과급제자이다. 그런데 한해를 걸러서 시아버지와 지아비를 잃었다. 그리고 뱃속에 있던 유복자 양사보를 갖고 있었다. 그 시대는 보편적으로 개가를 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댁이 있었던 남원 교룡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런데 왜구가 쳐들어 왔다. 이에 아들을 살릴 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때에 법술로 목기러기를 세 마리를 날려서 자신의 신후지지(죽은후 묻힐 자리)와 자신의 후손들의 세거지 그리고 아들 양사보의 자리까지를 잡았다는 여자 풍수 이다.

조선초 울산김씨를 멸문으로부터 구하고 명문가로 만든 흥려군배 여흥민씨.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 가면 울산김씨 중시조모인 조선개국공신 양주목사 흥려군 배 여흥민씨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이 자리도 또한 직접 할머니가 잡은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여흥민씨는 이방원의 처와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사촌간이었다고 한다. 태종 이방원이 외척척결을 위해서 처남을 숙청 할 때에 같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滅門)의 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에 자신의 자식들을 살릴만한 땅을 찾아 나섰는데 원래는 경상도를 향하던 길을 지맥을 따라서 전라도로 접어들게 되었고 장성 갈재에서 이분도 세 마리의 목메(목기러기)를 날려서 잡은 묘 자리라고 한다. 이 자리를 잡고서 할머니는 춤을 추면서 내 자손 중에 혈식(血食-피제사) 자손이 날것이며 나아가 이 뜰 안에 말을 탄 자손들이 가득하리라. 하였다. 한다. 이분은 국사풍수였던 무학의 여 제자이었다고도 전한다.

4-2. 여류문인 이야기.

여류 문인하면 청산리 벽계수야를 부른 황진이를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한시로는 부안의 기생으로 중국까지 이름 높았던 이매창이 있었고 충절로는 최경회 장군의 애첩으로 알려진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든 주논개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류시인으로 초당마마로 불리우는 김이양대감의 부실이었던 김부용과 여류시인이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였던 허난설헌등이 있다. 또한 고죽 최경창의 애첩이었던 홍랑이 있다. 이 모두가 전부 희한하게도 조선시대 전반기의 인물들로 임진왜란 이전의 인물들이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여류문인들이 등장할 법도 한데 이후는 등장하지를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 점차적으로 여자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돌아가고 있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고죽(孤竹) 최경창과 주고 받은 홍랑의 시한수만 적는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4-3 약봉 서성의 어머니 이야기

약봉 서성의 집안은 달성서씨로 조선조에 현달한 집안이었다. 한때 약봉과 그 자손들이 너무도 현달하여 조정의 대소 신료가 많으므로 임금이 하루는 농담하기를 "허! 조종안에 늙은쥐가 새끼쥐들을 데리고 조당을 가들 메웠구려"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가문의 현달에는 약봉의 어머니가 있었다. 한석봉의 어머니의 떡 이야기는 많이 알지만 약봉 서성의 어머니의 떡 이야기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약과가 약봉의 어머니가 만든 과자를 일컬는 말이었고 약주는 약봉의 어머니가 담근 술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약봉의 어머니는 장님이라고도 하며 또는 외눈박이라고도 한다. 사주단자가 오가고 집안 당숙과 약봉의 아버지가 처갓집을 염탐하러 갔다. 그러자 주막에서 사람들이 혀를 차며 말하기를 "누가 병신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야 외눈박이와 결혼하겠어 그런데 어떤 정신나간 놈이 외눈박이와 결혼한다지 뭐야!"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집안 당숙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파혼하자고 했다. 그러자 약봉의 아버지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멀쩡한 처자이면 내가 아닌 다른 곳이라도 혼처가 나서겠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처자이니 내가 아니면 어찌 결혼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결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런데 약봉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었다.

이에 어머니는 약봉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한양으로 이사하였다. 어찌 키울 것인가? 떡을 빚고 술을 담가서 약봉을 공부시켰다. 성한 몸도 아닌데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리하여 약봉이 대성하였을 때 약봉의 어머니의 떡과 과자 그리고 술은 장안에 유명한 명물이 되었다. 그러자 임금이 직접 약봉의 어머니를 보자고 하였고 떡과 과자 술을 진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맛에 반한 임금은 약과와 약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약봉과 약봉의 어머니에 대한 또 다른 일화 하나가 있다. 약봉이 어느 날 화공을 불러서 어머니를 그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화공이 감히 없는 눈을 그대로 그릴 수가 없어서 눈을 온전하게 그려 넣었다. 그러자 그 그림을 본 약봉은 화를 내었다. 너는 나의 어머니를 그리라고 하였는데 어찌 다른 여인을 그렸단 말이냐? 하고 다시 본래대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 어찌 그 아버지에 그 어머니 그리고 그 아들이 아닌가?

약봉이 성공하여 집을 지을 때 어머니가 낙숫물 소리를 듣고는 집의 크기를 아셨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더 넓게 지어라 더 넓게 지어라 내 죽기 전에 이 큰집이 넘칠 만큼 자손이 번창하고 현달할 것이니라" 과연 약봉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집이 좁아서 또다시 넓혔다고 한다.

4-4 채재공의 어머니 이야기

명재상 채재공은 영정조의 조선 부흥기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재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채재공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채재공의 어머니는 사주단자를 주고받았는데 그 집안의 예비신랑이 죽고 말았다. 꼼짝없이 청상과부로 살아야 할 시대적 상황이었다. 사주단자만 오가도 이미 결혼한 것으로 간주되던 그 상황에서 채재공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양반가인 친정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자 채재공의 어머니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어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자신은 시집가야겠다고 당당하게 하소연하여 허락을 받았다. 얼마나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겠는가? 그리하여 다시금 시집가서 낳은 아이가 채재공이다. 그러한 그의 아들이 정승이 된 것이다.

채재공이 어느 날 대신들과 논의하던 중 회의가 끝나지 않자 집으로 대신들을 불렀다. 그리고 회합을 하고 있는데 방안에서 요강에 오줌을 누는 소리가 들렸다. 채재공은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서 "웬 년이 대감들 앞에서 경망스러운 행동을 보이느냐?"하자. 방안에서는 대갈의 큰소리가 들렸다. "네! 에미다 네놈들은 오줌도 안 누고 사냐?"하고 문을 열고 나와서 대감들에게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전하다.


- 雪山 최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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