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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양철학이야기] 2 - 역사에서 찾는 강인한 여성들

편집팀( icomn@icomn.net) 2002.11.16 10:30

우리 역사속에 녹아있는 남녀평등관 (2)

태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찾는 강하고 넓은 여성상...

1. 태고시대(太古時代)

한단국(桓檀國)의 세상의 창조주는 여자인 마고(麻姑) 할머니였다.

신라만고충신으로 알려진 박제상의 작품으로 알려진 부도지(符都誌)가 있다. 부도지는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기술한 한단고기(桓檀古記)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부도지에는 태고적의 최초의 인류의 창조주는 마고(麻姑)라고 불리우는 분으로 여성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태초의 음양 기운과 천지기운을 얻어서 천지율려(天地律呂)로 기인하여 단성생식으로 두 딸을 낳으니 그들의 이름이 큰딸이 궁희(弓熙)였고 둘째딸이 소희(巢熙)였다. 두 딸들이 다시금 천지기운에 응하여서 단성생식으로 두 딸들과 두 아들들을 낳았으니 이로서 최초의 네명의 남자가 나왔다. 곧 궁희의 두아들이 황궁씨(黃弓氏)와 청궁씨(靑弓氏)였으며 소희의 두아들이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였다.

이로서 네 천녀와 네 천인들이 각각 율려를 맡아서 다스렸다. 이윽고 각각의 부부(夫婦)가 되어서 최초의 남녀배합의 이성생식을 이루어서 각각 세 남자와 세 여자를 낳으니 비로소 열 두 명의 선인과 열 두 명의 선녀가 나오니 이로서 세상의 모든 인류의 종족의 시조들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마고의 큰딸인 궁희를 거쳐서 황궁씨의 큰아들인 유소씨 그리고 한인(桓因)씨 한웅(桓雄)씨 나아가 단군(檀君)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고(麻姑)-궁희(弓熙)-황궁씨(黃弓氏)-유소씨(有巢氏)-한인씨(桓因氏)-한웅씨(桓雄氏)-단군씨
-청궁씨(靑弓氏)
소희(巢熙)-백소씨(白巢氏)
-흑소씨(黑巢氏)


2. 가야시대(伽倻時代)-김해김씨와 허씨들의 가락종친회.

김수로왕의 첫째와 둘째아들들은 어머니 성인 허씨를 따랐다.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머리를 내지 않으면
燔灼喫也(번작끽야)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龜旨歌)로 잘 알려진 가야의 여섯 왕들의 탄생설화의 주인공 김수로왕에는 인도의 사파국의 허 황후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열 명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김수로왕의 열 아들 중 첫째와 둘째 아들은 어머니 허황후의 성을 따랐다. 김수로왕의 셋째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해김씨의 2조가 되었다. 김수로왕의 나머지 일곱 아들이 성불한 곳이 바로 아자방(亞字房)이 있는 칠불사(七佛寺)이다.

현재도 모든 허씨와 김해김씨들은 가락종친회로 통일된 한집안의식으로 뭉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 당시에는 모계혈통을 따르는 것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더구나 구지가의 전설 속에 들어가 보면 모계적 혈통이 일국의 황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고 보면 그 이하의 층에서는 더더욱 많이 일어나고 있었던 유풍 이었을 것이다.

3. 신라시대(新羅時代)

신라의 화랑제도의 기원은 원랑제도인데 원화(元花)의 우두머리는 여자이다.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불리우는 집단이 바로 화랑이다. 화랑제도는 명산대첩을 돌아다니면서 심신수련을 통한 풍류신선도의 수련집단이었다. 이 집단은 원랑 제도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는 원화와 화랑제도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원화였는데 원화는 여자였다. 점차 남성중심의 화랑만이 남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여선(女仙)들의 수련조직이 상위조직이었으며 남선(男仙)들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나중에는 국가의 중추집단이자 특수교육집단으로 설정되는 화랑제도로 정착하게 되었다.

신라는 세계 최고의 여왕국이었다.-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신라는 세상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여왕국가였다. 물론 계급제도로 인하여 진골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우리 나라가 이미 세계적인 여성왕국이었음을 표기하고 있다. 항차 근대에 영국에 여왕이 나타난 것을 두고 여권국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욱 우스운 것이다. 신라시대에 당태종으로부터 너희는 수염 없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조롱까지 받았던 사실들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신라의 삼현(三賢) 중의 한 분인 강수(强首)의 연인은 대장장이의 딸이었다.-연애결혼의 증거.

신라시대에 삼현이라 하면 문창후 최치원 선생과 홍유후 설총 선생 그리고 강수선생을 들고 있다. 야사에 강수의 애인에 대한 전설이 있다. 강수는 당대의 유명한 천재이자 학자였다. 그는 달뜨는 밤이면 밤길을 산책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보름달이 휘영청 뜬 날에 달빛을 완상하며 걷고 있었다. 그때에 어디선가 대장간에서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소리에 끌려가다 보니 건장한 남자가 아닌 여인하나가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강수는 호기심에 수작을 걸었다. "아니 처자는 어찌하여 남자가 하는 힘든 일을 하시오."하자 그 처자가 "아버지가 수자리(병역의무)로 변방에 나가 계시는데 내가 어찌 집안을 돌보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강수(强首)는 한순간에 그 처자에게 반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밀회는 계속되었다.

강수는 신라최대의 천재요 학자였다. 그러므로 내 노라는 귀족들로부터 청혼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강수의 부모는 강수를 불러서 청혼한 귀족들과 결혼할 것을 원했다. 그러나 강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러자 부모는 아무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야사에는 야합(野合)이라고 쓰고 있다. 이는 문란한 성 관계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연애결혼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이자 장래가 총망 받는 사람이 이러할진대 당시의 풍조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연애 결혼의 풍조는 사실상은 조선 초 또는 중기까지 연연히 이어지는 풍습이었다.

이렇게 결혼한 강수와 강수의 처는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그리고 강수가 죽자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한 사실들이 왕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리하여 왕은 비단과 쌀 백 석과 여러 하사품을 내렸다. 그러자 강수의 부인은 한가지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궁궐로 다시 돌려보냈다. 왕에게 "내가 어찌 남편의 일생에 누가 되겠습니까? 저는 남편의 뜻을 따라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게 살겠습니다." 이 어찌 그 남편에 그 부인이 아닌가 부창부수(夫唱婦隨)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 雪山 최재은
* 조선시대 여성들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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