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인간이 뭐라고

[서평]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김경민( icomn@icomn.net) 2020.11.14 10:34

고대 중국에서는 종교 의식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지푸라기 개’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지푸라기로 만든 개는 신성한 제물인지라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귀한 대접을 받지만 의식이 끝나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고 짓밟히고 불태워진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 즉 지푸라기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물론 이 ‘만물’엔 인간도 포함된다. 천지 입장에서 인간이라고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대체 인간이 뭐라고?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는 2002년에 이 도덕경의 구절에 착안해 'Straw Dogs'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 이 책은 8년 후,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2010)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다. 여기서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는 '약탈하는 rapacious 자'라는 뜻으로 현생 인류 종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패러디한 용어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인간의 특성은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존 그레이의 인간관에 착안해 제목을 지었다, 고 책 날개에 적혀 있다.
  
  “이 책은 생각하는 사람들(사상가들)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신념에 대한 비판이다. 오늘날,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예전의 계시 종교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세계관의 핵심인 ‘진보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며, 세상 어느 종교보다도 인간이라는 동물human animal의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p.8) 

  책을 여는 저자의 첫 일성이다. 그가 보기에 휴머니즘은 ‘기독교 신화의 부패한 조각들에서 나온 세속 종교’(p.53)일 뿐이며, ‘휴머니즘을 믿는다는 것은 다양한 생명체와 풍부한 생태계를 가진 지구가 인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고 믿는’(p.84)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일 뿐이다. ‘기독교 시대 이전의 유럽 사람들은 미래도 과거와 다를 바 없으리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가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 과정’(p.11)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를 구원이라는 절대적 목적을 향해 가는 직선적 시간관에 가두었는데, 이는 인류가 다른 동물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이 믿음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구원 혹은 심판을 향해 간다)는 신념만큼이나 기독교의 핵심적인 오류이다. 지난 200년간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기독교의 기반을 흔들며 맞서 싸운 것처럼 언뜻 보이지만 그들 역시 이 핵심적인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러기에 장밋빛 환상을 제시하는 모든 유토피아적 전망(그것이 신의 구원이건 평등한 세상이건 윤리적 선함이건 인간의 자유의지건 첨단 테크놀로지 건 간에)는 철저히 거짓 희망이고 착각일 뿐이다. 이 거짓 희망과 착각이 인류가 서로에게, 다른 생물 종에게, 더 나아가 지구에 저지른 참혹한 폭력의 근원이다. 이 근원의 핵심에 바로 기독교를 대표로 하는 유일신교가 있다.

  “다신교도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그 신의 뜻을 남들에게까지 전도하려 하지는 않는다. 유일신교가 없었더라도 인간은 틀림없이 가장 폭력적인 동물 중 하나이긴 하겠지만 종교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다신교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공산주의나 ‘전 지구적인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호전적이고 과격한 신념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그런데, 즐겁지만 너무 한가하다. 다신교는 근대적 정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섬세하고 우아한 사고방식이다. (p.165)”

  저자의 싸늘한 시선은 기독교 뿐 아니라 서양 철학 전반에까지 미친다. 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도덕을 ‘발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도덕을 다른 모든 것들에 우선하는 특별한 가치이자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절대 법칙이라고 여기게 된 시초에 소크라테스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덕 개념은 부분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부분적으로는 그리스 고전 철학에서 물려받은 편견들로 이루어져 있다.”(p.143)
  과연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칙’ 같은 게 있을 수 있는가? 저자가 보기에 이런 의미의 도덕 개념은 ‘추한 미신’일 뿐이다.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 “정의는 관습의 산물이다. 관습이 불안정한 곳에서는 그 관습에 기반한 정의의 원칙도 곧 낡게 된다. 정의의 개념들은 모자의 유행이 지속되는 시간만큼 영원무궁하다.(p.138)"

  읽다보면 어질어질하다. 너무 통렬하고 신랄해서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삼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아직 본격적인 독설은 나오지도 않았다. 진보, 도덕, 정의, 휴머니즘이 그저 환상일 뿐이라면 인간이란 뭔가? 인간이 지푸라기 개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현생 인류는 지구 생태계를 이미 엄청나게 파괴했다. 그 파괴의 정도는 다른 생명체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인류의 축적된 지식과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편안한 삶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파괴와 살육의 도구로도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간헐적인 도덕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 순간의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 인류는 지구 생명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파괴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 같다. 이렇게 유독 파괴적인 종이 지구를 책임지게 하는 것보다 더 대책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지구를 아끼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지구 자원을 세심하게 살피는 인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와야 한다. (pp.34~35)”

  "호모 라피엔스는 많은 생물 중 하나일 뿐이고, 딱히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머지않아 인간 종은 멸종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 인간 종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후, 인간이 파괴하려고 했던 다른 많은 종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들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잊을 것이다. 삶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p.196)"

  이 책은 나에게 살짝 용두사미 느낌이 나는 대중철학서다. 강력하고도 신랄한 고발에 비해 대안은 다소 맥 빠지고 초라하다고 할까.(굳이 대안을 찾자면 이 책의 245~246쪽에 서술되어 있으나 그다지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생략한다). 그러다보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같이 지푸라기 개처럼 죽자는 거야?’ 라는 삐딱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확실한 근거와 치밀한 논증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학술서가 아니라 단상을 모아놓은 구성이다 보니 여기저기 울퉁불퉁 덜그럭 거리는 느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평을 쓰는 이유는? 한마디로 이 책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직접 인용을 많이 한 이유도 내 식대로 내용을 요약해 버리면 저자 특유의 풍자와 독설의 맛을 살리기 힘들어서다. 기존의 통념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관점을 가장 적합한 스타일로 서술하는 저자에게 나는 강한 매력을 느낀다. 이 책을 사람에게 비유한다면 믿음직스럽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독특하고 강한 매력으로 다른 이를 끌어당기는 사람이다. 참고로 김소연 시인은 이 ‘매력’의 본질적 측면을 《마음사전》이라는 책의 126쪽에서 이렇게 묘파한다.

  “착하고 순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우리는 결코 ‘매력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럴 경우 ‘미덥다’는 표현을 더 쓰게 된다. 한 존재가 가진 결핍과 과잉. 모자라거나 지나친 성향들. 그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호할 때, 이 낱말은 제법 용이하게 쓰이곤 한다.” 

20201108_171219.jpg

-----------------------------

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