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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스크 시국에서의 불쾌

오길영( icomn@icomn.net) 2020.04.14 14:43

지금의 우리에게,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는 다소 예민한 이야기를 펼쳐 볼까 한다. 코로나19의 공포가 본격화될 때부터, 필자가 속해있는 각종 ‘톡방’에서는 이미 역학조사의 정도와 확진자 동선관련 정보공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번 사태의 와중에서 비교적 초기였던 당시에는, 실제로 과도한 정보공개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사례도 있었다. 확진자 거주지의 번지까지 공개하거나 직장에의 임용시기까지 공개한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각 지자체별로 정보공개의 정도나 범주가 상이하여 발생하는 문제 또한 있었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몇몇은 다소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의욕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소위 ‘신천지’ 상황으로 인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하기도 하였고 보건당국이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여 문제의 소지를 줄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감염이 다른 지역이나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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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라. 어떠한 시점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나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마스크’가 아니라 스스로의 비감염을 확신할 수 없기에 혹시 모를 전파에 대비한 ‘배려적 마스크’를 쓰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다들 그를 향해 비난의 눈총을 쏘지 않던가. 그 비난의 눈총은 그가 자신과 가족에게 무책임하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아니라, 그가 접촉하게 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일종의 ‘싸가지’ 없음에 대한 비난이다. 이런 눈총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은 의학적 공포와 무관하게 사회적 이유로 인한 마스크 신봉자가 되기 마련이다. 즉 타인으로부터 감염을 피하기 위한 방역목적의 마스크이기 보다는, 불측의 가해를 하지 않겠다는 상징이자 매너 있는 사회구성원임을 표시하기 위한 사회적 목적이 더 큰 마스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너의 이면에는 부인하기 힘든 불쾌와 공포가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확진자가 되면 여지없이 ‘탈탈’ 털린다는 불쾌와 처절한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진다는 공포가 그것이다. 강남의 유흥업소를 출입한 바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검색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보건당국으로부터 문자로 수신된 누군가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알아내는 정보자체의 심도 또한 대단하다. 확진자의 정체는 물론 그와 접촉이 예상되는 연인, 그리고 그 연인의 아버지 직업까지 낱낱이 밝혀지는 우리네 정보수집과 공유의 실력이란 그야말로 ‘IT강국’이라던 한 때의 칭호에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를 쓰는 모양이다. 혹시라도 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얼굴의 반이라도 가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 또한 배려라면 배려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무언가 떨떠름함이 지속되는 묵비의 환경에서 몇 달을 지내온 우리에게, 오늘자로 올라온 프랑스발 기사(경향신문, 2020.4.12자, “프랑스 유명 변호사 ‘한국, 방역 잘 했지만 오래 전에 개인의 자유 버린 국가’ 비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121616001&code=970100#csidxf088f79b3e00aeaae4a194ececd13eb>)

는 적잖은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우리의 방역성공이 철저한 확진자 동선추적의 덕분인데, 이는 중국이 개발한 디지털 감시와 시민 억압을 한국이 따라한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에는 이러한 초감시·고발 문화가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버려버린 이들 나라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기사를 접한 사람들마다 해석과 입장이 상이할 수 있겠으나, 필자 또한 불쾌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정확한 사실에 터 잡은 추측성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양국은 디지털 추적과 감시에 있어 그 방식과 수준에 분명한 상이를 보여 왔다. 주로 물리영역에서 접속자체를 무차별 차단하던 중국과는 달리, 우리는 접속의 내용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훨씬 더 세밀한 논리영역에서의 통제를 지속해왔다. 또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실시한 바 있던 인터넷 실명제의 경우, 그 통제효과에 반한 중국이 차용하려고 했을 뿐 우리가 중국을 따라한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를 중국과 싸잡은 것부터가 잘못된 발상이다.

 

한편 우리에게 초감시·고발 문화가 있다는 발언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우리는 지금껏 주민등록번호가 그토록 많이 털려도 원하는 누구에게나 서슴없이 내어주었으며, 그런 상대가 오남용을 일삼아도 고소·고발을 통하여 대응에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저 ‘팔자려니’ 하고 참아왔던 것 아니겠는가? 그는 정말 우리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오래 전에 개인의 자유를 버려버린 나라’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잘못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네트워크에 대한 권력의 폭압이야 여타의 국가보다 강력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시민들은 단 한 번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민주적인 공론의 장이자 투쟁의 공간이었으며 연대와 실천을 담아낸 그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로 기능해왔다. 전 세계를 주목시켰던 촛불혁명을 구현해 낸 것이 바로 우리네 네트워크의 역량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분석은 전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필자는 내심 우리네 방역추적과 성공을 부러워하는 유럽국가에게 이러한 힌트를 주고 싶다. 당신들이 지금 급하게 찾고 있는 초감시·고발 문화는 입법의 방식을 통해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다. 추적이 가능하다는 원칙은 최대한 간략하게 법률에다 기입하라. 근거로서만 기능하면 되기 때문에 상세를 밝혀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추적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은 적시하지 않거나, 하위법령에 위임하거나, 이 또한 여의치 않으면 부칙 정도에다 대강 나열하는 정도로만 기입하는 것이 좋다. 특히 구체적인 방법이나 범주의 설정 등은 반드시 묵비하라. 그래야 특정 상황에 부합하는 탄력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수 있고, 누군가가 피해를 호소해오면 법적 공백으로 인해 마련된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상황방어에 훨씬 더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이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이나, 공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팔에다 추적용 ‘손목밴드’를 채우겠다고 대대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물론 반발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바로 실천해내기는 힘들겠으나, 적어도 확진자의 동선정보를 공개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다는 자들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이렇듯 우리네 경험과 수준을 저평가하다니, 이리하여 필자는 별로 유쾌하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불쾌감의 원인을 헤아리며 고민하다, 오랜 친구들이 모여 있는 ‘톡방’에다 이러한 고민의 일부를 걸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현 시점에서 방역이라는 공익과 프라이버시라는 사익의 형량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그랬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공익 쪽에 표를 준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지금이 주식투자의 기회라며 투자의 시기와 종목에 대한 각자의 논의를 이어갔다. 그래서 오늘, 이토록 많이도 불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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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 신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부교수, 정보통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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