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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직역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

이창수( icomn@icomn.net) 2020.10.10 12:56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 역사를 지나다가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 왔다. 공사중이 이 역사의 벽에는 “건설기술인 권리현장”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건설기술인, 권리, 현장”?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법전의 권리와 현장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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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으로 보면 분명 헌장(憲章)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 거기에는 권리‘현장’으로 적혀 있었다. 생각이 복잡해 졌다. 사전에서는 헌장(憲章)을 “어떤 사실에 대하여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정한 규범”이라고 적고 있다. 한자를 기계적으로 풀이 하면, “법 그러니까 가르침이나 본받을 글” 정도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포스터를 제작한 타이피스트도, 포토샵 작성자도, 제작 책임자도, 발주한 곳에서도 오자는 걸러지지 않고, ‘권리현장’이 납품되고 게시되었다. 헌장이라는 단어나 말이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거의 사어이고, 배운 사람들과 정치하는 사람들의 법문에서만 작동하는 말이다. 어린이헌장과 같은 말을 일상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관련 업계의 종사자나 배운 듯한 사람들만 사용하는 말이다. 오히려 이 실수가 말해 주는 것들이 더 많다. ‘권리’ ‘현장’. 바로 실제 작동하는 작업장(현장)에서 활용되는 ‘건설기술인’의 권리가 더 생생하다고 느껴졌다.

법전 속의 권리인 ‘헌장’나 실재 작동되는 권리 ‘현장’은 괴리가 있다.

 

건설기술 진흥법은 2008년 개정 될 때, "건설기술인단체는 건설기술인의 업무수행과 관련된 권리·의무 등 기본적인 사항을 건설기술인권리헌장으로 제정하여 공표할 수 있다"(법 제22조의2제3항)고 규정하고 있다.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규정하도록 하고 그것은 ‘권리’의 범주로 퉁치는 법 규정 관행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설기술인은 ‘그 업체 또는 업체 대표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 건설기술 작업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아닌 것이다. 즉 이 권리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사람의’ 권리 영역과는 무관하다.

 

법정 헌장 제정, 사업자 단체는 되고 노동자 단체는 않되고

 

권리는 일종의 대항해 맞설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정당한 것이다. 권리 중에 법적인 권리 즉 권한이 있는 자에게 법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가장 실현될 가능성이 높고 강력하다. 대체적으로 소송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권리헌장’은 소송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건설기술인’에게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도록 또는 발주와 그 과정에서 외압으로부터 그 발주자인 건설기술인 기업들이 부당한 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약속을 적은 것이다. 물론 수권 규정을 두고 있지만 관련 업계가 제정했고, 공공 발주처에 항변할 수 있는 근거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국가가 보장하는 ‘건설기술인’의 존재, 즉 승인을 확인 받은 것에 불과하다. 건설기술 노동자의 체불임금이나 작업장 안전과 적정임금, 쉴 권리 등과 같은 다음 ‘인간’이기 때문에 생긴 권리인 ‘인권과는 무관하다. 이런 면에서 건설기술노동자는 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건설기술사업자는 승인을 받은 것이다. 건설노동자단체인 건설노조에서 건설노동자의 권리헌장을 제정하는 인권적인 내용은 법으로 보장하고 있지 않다.

 

사람을 보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나는 십 수년 전에 대학에서 ’인권과 사회‘ 과목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부과했던 과제 중에 하나가 부모나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권리를 몇 가지 조문으로 만들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하는 어떤 학생은 “세탁소 주인의 권리”라는 말을 제출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과 관련된 세부적인 권리들을 생각하고 배우는 계기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무수하게 많은 사람과 관련된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 직역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은 직역의 사업자들에 대해서는 ’권리‘를 법률적 근거를 갖추어 승인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직역의 이익에 불과해 보인다.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의 제정이 답보 상태에 있다. 실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일은 보편적인 인권과 관련된 일이다. 그런데 법으로 제정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업계나 기득권 질서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들의 존재와 활동은 승인하고, 현장/현실에서 권리가 필요한 사람들의 존재를 미승인하는 상태에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현장에서 보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은 이 상태는 법적으로 차별금지헌장에 차별받는 자의 권리를 외치게 하면서도, 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봉사할 의무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국가 후견주의적인 ’헌장‘ 체계를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법이 민주화되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면, 이를 법적인 권리로 실현시켜야 한다.

 

<참고>

 

“한국건설기술인협회”가 제정한 ’건설기술인 권리헌장‘과 이 협회가 밝힌 ’의미‘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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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기술인 권리헌장>

 

「건설기술인 권리헌장」은 국민 삶의 질 향상과 건설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건설기술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건설기술인이 사회적 사명을 다하여 건설공사의 안전을 확보하고 공공복리의 증진과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발주자와 사용자의 위법하거나 각종 기준·표준에 어긋나는 요구에 대해 거부할 수 있고, 이로 인한 불이익에 대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근무시간과 보수, 근무환경 등에 대해 전문가로서 차별 없는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정부와 사용자로부터 이에 대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신체, 재산 등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최상의 품질과 성능이 확보된 안전한 시설물을 건설한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고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투명하고 공정한 건설문화 창달에 앞장서는 등 스스로의 위상을 제고한다.

하나, 건설기술인은 사회적·경제적 영향력과 지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건설산업의 올바른 가치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ㅇ 항목별 의미

- [전문] 권리헌장 제정의 근거와 목적을 간략히 서술하되, 건설기술 진흥법 제1조(목적)에 명시된 안전에 대한 확보 및 공공복리의 증진과 경제발전에 관한 내용을 명시

- [제1호]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와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을 경우 구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한 것으로 건설기술진흥법 에 포함된 내용을 재차 명시

- [제2호] 모든 건설기술인이 최근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와 관련한 근로시간, 그리고 임금 등 다양한 근무조건 및 근무환경과 관련하여 정규직/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없이 합리적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명시

- [제3호] 건설기술인이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인 자기개발 및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와 건설기술진흥법 제20조(건설기술자의 육성)에 명시된 교육훈련을 지원받을 권리에 관한 내용을 통합하여 명시

- [제4호] 부실시공 예방과 관련된 것으로 최고의 품질과 성능을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명시

- [제5호] 국민의 안전과 생활에 가장 밀접한 건설기술인이 책임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각종 입·낙찰 비리와 같은 부정·부패 척결 등 투명하고 공정한 윤리의식을 가질 의무를 명시

- [제6호] 건설기술인이 부정적 이미지 탈피를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건설산업의 가치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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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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