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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축년(辛丑年) 단상

김영문( icomn@icomn.net) 2021.02.09 16:25

며칠 전 입춘이 지났고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식적으로야 양력 1월 1일이 새해의 시작이지만 24절기와 민간 풍속에서는 입춘과 설날을 전후하여 새해 새봄이 도래함을 알린다. 요즘은 흔히 양력 1월 1일이 되면 경자년(庚子年)이니 신축년(辛丑年)이니 하며 그 해의 간지(干支)로 새해가 되었음을 축하하곤 하나, 기실 간지법은 음력에 해당하므로 양력으로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경자년이 바로 신축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양력은 대체로 음력보다 1개월 정도 앞서가므로 양력 1월 1일이라 해도 음력으로는 12월인 경우가 많고, 2020년[경자년]처럼 윤달이 드는 해는 음력 11월에 양력 새해가 닥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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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기념우표 2종, 우정사업본부)

하지만 이제는 입춘이 지나고 설날을 맞이하는 때이니 명실상부하게 경자년이 신축년으로 바뀌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매체에서는 신축년을 흰 소 즉 백우(白牛)의 해라 부르고 있다. 왜 흰 소일까? 음양오행설에서는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의 천간(天干)을 각각 둘씩 떼서 차례대로 오행상생(五行上生)의 원칙을 적용하고 거기에 색깔을 부여한다. 쉽게 말하자면 갑과 을은 목(木)에 배당하고 색깔은 청(靑), 병과 정은 화(火)에 배당하고 색깔은 적(赤), 무와 기는 토(土)에 배당하고 색깔은 황(黃), 경과 신은 금(金)에 배당하고 색깔은 백(白), 임과 계는 수(水)에 배당하고 색깔은 흑(黑)을 부여한다. 또 잘 알다시피 지지(地支)의 축(丑)은 소띠이므로 이 원리를 신축년에 대입하면 바로 신(辛)은 백(白), 축(丑)은 소 즉 우(牛)가 된다. 신축년이 흰 소의 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가축으로 경운기나 트랙터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가의 재산 목록 1호인 동시에 농경에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또 암소가 한 해에 한 번씩 생산하는 송아지는 객지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딸의 학자금 종잣돈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 50~60대 인물들 중에는 이 송아지 학자금으로 학교를 다닌 분들이 많다. 상아탑을 빗댄 우골탑(牛骨塔)이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주역』 「이괘(離卦)」 괘사(卦辭)에 “이(離)는 이롭고, 곧고, 형통하니, 암소를 기르면 길하니라(離, 利, 貞, 亨, 畜牝牛, 吉.)”라고 했으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암소를 유용하고 상서로운 가축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소와 관련하여 우경(牛耕)을 소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러나 우경 즉 소로 땅을 갈아 농사짓는 일은 철기(鐵器)가 널리 보급된 이후 개발된 농사 방법의 하나다. 청동기보다 단단한 철제 농기구가 생산되고, 이 과정에서 땅을 깊게 갈 수 있는 철제 보습이 발명됨으로써 이것이 소의 강한 노동력과 결합했다고 봐야 한다. 그럼 우경 이전에는 소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대체로 물건을 운반할 때 소의 힘을 활용한 시기가 우경 시기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파악된다.

이미 기원전 2500년경 수메르 시대 도시국가 우르의 왕릉에서 2륜과 4륜의 수레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1300년경의 은나라 소달구지 유물이 발굴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고조선 영역인 평북 염주군 주의리에서도 기원전 7~6세기의 수레바퀴 조각이 발굴되었으며, 마한 영역인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서도 기원전 1세기의 옻칠한 수레바퀴 유물 조각이 발굴되었다. 물론 발굴된 수레바퀴 유물이 말이 끄는 이동용 수레나 전투용 수레일 수도 있지만, 수레바퀴가 있는 곳에는 운반용 우거(牛車)가 함께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상 속에서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거나 전투 시에 군량이나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소와 말을 동시에 이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이 두 가지 수레가 함께 등장한다.

소의 강한 힘을 널리 이용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소의 우직하고, 신의 있고, 근면하고, 중후하고, 인내심 강하고, 충성스러운 품성에 주목하여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신성한 매개체로 소를 숭상하기도 했다. 고대의 제사에 올린 제수(祭需)인 희생(犧牲)에 바로 이런 의미가 스며 있다. 또 중국 춘추시대 제후들이 회맹(會盟)을 할 때도 소를 희생으로 삼아 삽혈(歃血) 의식을 진행했다. 즉 회맹의 맹주가 소머리의 귀[牛耳]를 칼로 잘라 피를 그릇에 받은 후 그 피를 제후들이 조금씩 나눠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면서 공동의 약속을 지키자고 맹세했다. 어떤 일을 주재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우이(牛耳)를 잡는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후 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농사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됨으로써 인류와 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불교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소와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와 관련된 설화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는 의우총(義牛塚)을 둘러싼 매우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 인조 무렵 인덕리 주민 김기년의 암소가 호랑이에게 습격을 받은 주인을 구했고 이후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이 소가 여물을 먹지 않고 사흘만에 역시 주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이다.

뿐만 아니라 근래 경북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에서도 믿기 어려운 의우(義牛) 이야기가 탄생했다. 2007년 『한겨레신문』 1월 12일 전국일반 기사에 그 내용이 실렸다. 묵상리 주민인 서석모 할아버지와 임봉선 할머니가 키우던 암소가 1993년 이웃집 김보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자, 그다음 날 고삐를 끊고 집에서 2km나 떨어진 산속 묘소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고, 주인이 소를 찾아 귀가하던 도중에도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김보배 할머니의 집으로 가서 빈소 정면에서 마치 문상을 하듯 서 있었다고 한다. 김보배 할머니는 생전에 그 소가 비록 이웃집 소였지만 평소에 오고 가며 어루만져줬고 주인이 없을 때는 여물을 주며 정을 쏟았기에 소가 그 정을 잊지 못해 각별한 슬픔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소가 14년 후인 2007년 세상을 떠나자 상주시에서 장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의로운 소를 위해 상주박물관 옆에 무덤을 조성하고 그 무덤을 의우총이라 명명했다.

소의 해 신축년을 맞이하여 우직, 신의, 근면, 중후, 인내, 충성으로 대표되는 소의 품성을 본받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의 바탕에는 자칫 맹목적 충성이나 순종을 미화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경향이 스며들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이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소 사이에 존재한 종을 초월한 깊은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요소가 아닐까 한다. 이 같은 공감과 연대의 정이 만물로 확장될 때 인간 사회뿐 아니라 자연과 환경을 우리와 동일체로 간주하는 생명 존중 정신의 바탕이 마련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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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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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자. 번역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문학박사.

중국 베이징대학 방문학자(한국연구재단 Post-Doc.)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경북대, 서울대, 한국교통대 등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

저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근현대 대구경북 중국어문학수용사』(공저) 등,

역서: 『동주열국지』(전6권), 『원본 초한지』(전3권), 『삼국지평화』, 『정관정요』, 『자치통감을 읽다』,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루쉰전집』(전20권 공역) 등 3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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