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압도 사회에서 시민이 사는 법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4.08 10:20

우리는 현재 ‘코로나19 위기’와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압도적인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계절의 순환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도 머리로나 행동으로 부정되거나 스스로 부정한다. 정확히 말해서 압도적인 것에 맞춰야 한다. 이 압도적인 힘이 작동하는 사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절대적인 힘이 작동하는 사회이다. 이 절대적인 힘은 진리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다. 과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고,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오늘을 규정하는 인위적인 결단이기 때문이다.

 

압도 사회

한국 사회는 과거 독재를 경험했다. 힘을 가진 소수가 오늘을 규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독점함으로써 수평적인 작은 힘들을 결집하거나 조화를 이루기보다 이를 파괴하고 주축에 속하는 인위적인 힘, 즉 독재체제에 작은 삶의 추진력을 굴복시켰다. 그런데 압도적인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과학정신이 배제되고 다른 의견과 지식은 묵살되어, 소수 집단의 집단적인 믿음체계와 사고체계가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월등한 힘이나 능력으로 누르는 것을 압도한다고 하고, 이런 월등한 힘이나 능력으로 누군가는 꼼짝하지 못하지 압도당하게 된다. 지배의 법칙만이 허용되는 이런 사회 상태를 “압도 사회”라고 하자. 이 압도 사회는 위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시대를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사람이 아니라 사태에 주목하기 때문에 ‘살기’보다는 ‘대응하기’ 급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침이나 기준이 제시된다. 이 지침과 기준이 법으로 표출되고, 그 본질은 권력의 힘이나 폭력이다. 이런 압도적인 것의 내용은 다수가 형성하는 체계인 국가, 정치, 지식, 언론이라는 권력이 만들어 낸다. 이것은 법과 그것을 운용하는 법률가, 검사, 경찰, 판사들이라는 권력자들에 의해서 지탱된다.

이런 압도 사회는 통상 ‘비상상태’와 비슷한 때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비상상태는 늘 있었다는 점이다. ‘대응’해야 하는 ‘긴박한 필요’를 다수가 인정할 때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번 코로나19 위기가 사라지면 또 다른 압도적인 기표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압도 사회는 어떻게 유지 되는가?

 

코로나19 위기와 불안한 지식

코로사19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이슈가 됐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한다는 경제와 인권의 문제보다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다. 흡사 전쟁과 같은 사태로 규정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규정이다. 이 규정을 하는 힘은 지식이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은 행사된다. 그런데 코로나19에 대한 백신도, 치료약도 없다는 점만을 아는 지식체계 하에서도 우리는 의료나 재난관리를 위한 콘트롤 타워의 지침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마스크가 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데 효과 여부에 대해 지식(인)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한다. 건강한 사람은 바이러스 감염에서 자기 치료가 가능하다는 지식과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만성질병을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덜 건강한 사람에게 감염시킬 수 있어 결국 바이러스 확산을 부추친다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지식’을 말한다. 압도적인 지식은 없으며 지식은 늘 불안한 것이다. 사회적·신체적 거리두기나 자가 격리 등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상식적이다. 해외 각 국이 취하는 봉쇄정책이나 지역간 이동 금지 명령과 같은 ‘압도적인’ 힘으로 취하는 조치에도 어떤 면에서 사회과학적인 합리성보다는 단순한 감염원 간의 접촉 금지라는 보건방역적인 상식에 기초해 취해진 것이지 이를 통일시킬 지식체계는 없다. 즉 각국 마다 대처 방식이 다른 것이다. 코로나19 위기에 봉착하면서 경제적인 관계가 위축되거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경제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대책을 지원한다는 대책들도 따지고 보면 강자의 경제체제가 붕괴될 것 같은 기존의 경제지식 체계에 기초해 대책을 세운다. 결국은 코로나19 위기 사태에서 대응은 여전히 계급적이고 권력적이다.

정부는 점차 자가격리 대상자를 주민이 감시하고 신고하는 체계를 검토한다든지, 심지어는 그들에 대해서 전자팔찌를 채우는 조치도 검토 중이라는 발표까지 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위기로 인한 고통은 누구나 받고 있는데도, 그 경제적인 지원대상을 선별하다거나 현금이 아니라 상품권 등과 같은 유사 화폐를 통해서 지원하는 방식은 모두가 기존의 경제지식에 기초한 것이다. 국가 권력은 코로나19 위기라는 압도적인 사태를 설정하고 이를 대응하기 위해서, 국민을 선별하고 구별하는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판정하고 실행하는 힘을 국가가 갖고 있는 행태를 그대로 보인다. 결국은 권력만이 살아남는다. 권력자는 늘 국민의 삶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위기에 대응한다는 결핍의 상황, 압도적인 사태를 상정한다.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 말이 정책의 ‘선택과 집중’이다. 자원은 희소하다고 가정하고, 이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힘을 가진 이른바 공식 권력은 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다수의 삶을 현행 권력 아래에 복종시킨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허위 정치

앞으로 1주일 동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압도적인 이슈는 총선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는 비례대표, 비례정당, 위성정당 등의 말이 유독 회자되고 있다. 정치적인 힘을 가진 양당의 자기 권력 복제를 위한 선거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했기 때문이다. 선거 때도 국민은 정당이 제시한 후보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마치 코로나19 생계지원금을 선택의 여지없이 ‘상품권’으로 받는 것과 같다. 현금이 아니라 상품권처럼, 주권행사가 아니라 투표권행사가 되는 것이다. 정책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표지로 그 권한을 행사하는 자나 집단이 권력을 유지하듯이, 선거도 제한된 제도인 정당에 의해서 주어진 사람 중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이런 제도적인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른바 위성정당을 둘러싼 논쟁은 뜨겁다. 거대 양당의 권력을 위한 장식이 되어 버린 이른바 연동형비례대표제도의 허점이 드러났다.

비례정당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지역에 기초한 현행 정당법은 어떤 면에서 다양한 정당형태를 인정하지 않고 주권자를 지역 주민으로 한정하는 경향을 갖고 있어, 이 조직을 갖고 있는 양대 거대 정당에게 원칙적으로 유리하다. 즉 비례 국회의원 후보만을 출마시킬 수 있고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문제는 ‘위성’ 정당이다. 즉 형식적으로 우당이니 자매당이니 하지만 결국은 양대 거대 정당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비례후보만 내는 정당들 말이다. 어떤 면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이런 정당들을 마치 조선노동당이 집권하는 북의 체계에서 천도교 정당이나 사민주의 정당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보면 얼마나 가당치 않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인가? 거대 양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선택과 집중’, 즉 불완전한 지금의 정당지형에서 선거를 할 때도 이런 원리에 의해서 남을 설득하고 자신의 투표 행태를 합리화시킬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도 선택과 집중이라는 잠정적이고 불안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허위의 정치가 지속되는 이유이다. 선거만 있고 정치는 없고, 정치가 선거로 이어지지 않고, 선거 때면 다른 잣대인 ‘승리’하는 정치만이 ‘선’이라는 허위 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압도 사회는 결국 선택과 집중이라는 부실하고 사악하고 미봉적인 기준을 강요하고 집단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압도 사회에서 시민으로 살기

결국은 살기의 문제다. 시민으로 코로나19 위기로 만들어진 소수의 지배질서 체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허위의 총선 국면에서 주권자로 살아가기의 문제이다.

우리는 살아내기에 급한 사람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기가 가능한 여유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지만 중요한 것은 전자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후자의 낭만적인 허위체계를 극복하는 것은 시민으로 살아가기이다. 시민이 살아갈 자기 윤리를 정하고 이를 묵묵히 살아가는 실천이 중요하다. 압도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평등의식과 그 실천에서 나온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사람이다. 똑같은 시민이라는 의식으로 보면 나는 남을 해할 권리가 없고, 그렇다고 내가 나를 정당한 이유 없이 부당하게 취급받을 필요가 없다. 자가격리 대상자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자가격리를 하는 능동적인 시민의식을 윤리적으로 실천하면 된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이 다른 시민과 공생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윤리라는 의식을 갖고, 코로바19 확산 방지를 위한 시민적인 예방수칙을 능동적으로 준수하고, 이 재난위기로 인해 어려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의 1인’으로 똑같이 지원대책을 요구하기이다. 이것은 기존의 불안한 지식으로 지탱되어온 압도적인 지식을 해체시켜 근본적인 개혁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기존 거대 양당들이 만들어 놓은 선택과 집중을 강요하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든 비례대표든 정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따져 보자.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존의 논리로는 선거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철저하게 비례대표자들을 살펴 보자. 상대적으로 이쪽이 낫다는 기준으로 하지 말자. 철저하게 최선의 적임자가 누군지 그렇지 않은 정당의 비례대표는 어떤 순번을 갖고 있는지를 따져 보자. 많은 다양한 잣대로 다양한 모습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찍을 후보가 없으면, 투표하면서 무효를 만들어도 좋다. 압도 사회를 만들어 놓고 소수가 전횡하는 정치를 바로 잡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기권이 아니라 무효표가 5%, 적극적인 현행 정당 정치 불신을 표출하는 시민이 나오면 정치 개혁된다. 주권자의 지위가 회복된다.

-------------------------------------------

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bLE_o9el_400x400.jpg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