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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서평]<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2020)

김경민( icomn@icomn.net) 2020.12.12 11:30

어린 시절, 나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온전하게 이해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아마 이 문장을 나의 부모님이 읽는다면 서운하고 당황하실 수도 있겠다. 나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타입이고, 덕분에 나는 비교적 안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나는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충분히 사랑받는 것과 온전히 이해받고 존중받는 것은 약간 다르다. 흔히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을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런 사랑엔 (주는 사람의) 자기중심성이 내재해있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종종 자신보다 더 자신, 가장 지독한 자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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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학교는 어땠나. 내 경우엔 상황이 훨씬 나빴다. 내가 지금도 시골학교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는 이유는 나의 유년 시절 경험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시골 ‘국민학교’의 교사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매우 폭력적인데다가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찌들어 있었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한마디로 너절한 사람들이었다. 4학년과 5학년 때 담임교사는 일기 검사를 했는데, 그들에게 몇 번 상처를 받은 후, 나는 제출용 일기와 진짜 일기를 따로 썼다. 부끄러워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진짜 마음이 적힌 글을 ‘읽을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아, 이 문장을 써버리고 나니 오랜 시간 동안 심장 한 구석에 박혀있던 작은 가시 하나가 뽑힌 기분이다.

 

어른들은 자신이 한때 어린이였다는 이유로 어린이의 세계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한다고 해서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어린이라는 세계’에 다시 진입하는 가장 흔하고 빠른 방법은 부모가 되는 것이겠지만 부모가 된다고 해서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부모가 이 세계를 망치는 짓을 별 생각 없이 저지른다.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2020)를 쓴 저자 김소영은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한 후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기혼 무자녀 여성이다. 그럼에도 어떤 엄마보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굳이 능력이라고 쓰는 이유는 이게 단순히 태도나 스킬을 뛰어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사려 깊고 올곧은 인간관과 세계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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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도 SNS에서 “여러분, 우리 아이를 낳지 맙시다”라는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출생률 때문이 아니라, 이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라”하고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낳지 말자”라고 받아치면 안 된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약자를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이.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중략)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지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가 어린이와 친하든 어색하든,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다’. 절망을 말을 내뱉기 전에 어린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pp. 21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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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이런 어른이 내 곁에 있길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면서 동시에 엄마인지라 슬그머니 드는 욕심. 이런 선생님이 내 아이를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는 아이를 칭찬할 때 ‘착하다’는 말을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범람하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며,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말에 찜찜함을 느낀다. 나는 그녀의 문제의식에 완벽하게 공감한다. 나 역시 아이가 없는 곳에서 아이를 칭찬할 때는 ‘착하다’는 말을 가끔 쓰지만 아이 면전에선 쓰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잡이로 송출되는 육아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거부감이 있어서 보지 않는다.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레토릭일 뿐, 이게 가르침의 실제적인 매뉴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게 왜 문제인지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면 된다!)

 

어린이를 잠재적 어른, 즉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도 그저 과도기, 수단의 시간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중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지 않은가. 모든 순간이 그 자체로 찬란히 빛나는 ‘목적의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어린이로 살기 위해 존재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세계에 더부살이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린이라는 세계의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이 책은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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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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