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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체벌은 용인될 수 없는 폭력"

"고문과 동등한 폭력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없어"

채민(전북평화와인권연대)( jbchamsori@gmail.com) 2015.09.15 09:54

<편집자 주 -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채민 활동가가 전민일보에 연재하는 고정 칼럼입니다.>


전북교육청 산하 전북학생인권교육센터가 8월 27일에 지역의 학생인권침해 사건들에 대해 브리핑을 한 내용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인권단체에서 진정을 했던 한 부모 가정 등 가정환경 공개 거수 조사 사안을 비롯해 강제 학습이 여전히 학교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특히 체벌 문제가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는 한 학교의 사례는 충격적이었다. 모 고등학교에는 체벌이 버젓이 학교생활규정에 포함되어 있고 교사들이 학생의 성적과 수업준비에 따라서 체벌을 가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이 학교의 체벌에 힘들어하던 중 결국 전학을 선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체벌을 학교생활규정에 버젓이 넣어둔 그 학교와 이를 충실히 행하는 교사들에 대해 참담함과 함께 분노가 올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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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체벌 도구로 사용한 나무주걱<사진 제공 - 전북교육청>


그래도 학교 현장이 폭력의 문화를 점점 멀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교사들과 학생인권교육 강사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이런 사건들 앞에 그 희망의 말들이 무색해지며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금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인간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처벌은 존엄함을 무너뜨리는 인권침해다. 가령 자동차 과속이나 주차위반을 했다고 하여 그것을 행한 시민의 머리를 때리는 경찰이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당장 경찰을 해임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서비스 노동자가 고객에 의해 멱살을 잡히고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문제는 시쳇말로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문제제기가 되고 있다.


분명 학교 현장의 다양한 체벌과 같은 폭력이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분위기임에도 유독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서만큼은 집요하리만큼 계속된다. 물론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과 학원 등 어린이와 청소년이 있는 공간들 역시 그들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체벌이 위험하고 비교육적이며 그것으로 달성할 수 있는 효과도 거의 없음은 이미 여러 영역의 연구결과로 나타났음에도 말이다.


체벌은 한 사람의 인격을 꺾는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감수성을 더욱 추락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몇 주 전 서울의 입시학원 강사가 가정에서 맞는 학생들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강사는 성적 문제로 가정에서 체벌을 당해 코뼈가 부러진 학생에게 청소년 기관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조언을 했으나 피해 학생은 오히려 기막혀 했었다. ‘그런 곳’은 문제아가 가는 곳이라는 얘기를 하며 질색을 했다고 한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되는 체벌은 피해자가 폭력을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오히려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은 다르게 말하면 폭력의 내면화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폭력의 직간접적 피해자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높다는 국내외의 연구결과들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한편으로 ‘폭력을 당해도 되는 인간’이 있다는 섬뜩한 차별을 찬성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인식이 다시 ‘학생을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자’는 미명아래 체벌을 용인하는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함은 말할 것도 없다.


2009년에 유엔고문방지협약 특별보고관은 고문 금지와 관련된 국제 규약이 ‘교육 또는 훈육수단으로서의 체벌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확대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고서에 담기도 했다. 끔찍한 범죄인 고문과 동등한 폭력을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에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 멈춰야만 할 것인가. 우리의 지향이 폭력의 악순환을 공기처럼 받아들이는 세상이 아니라면 그 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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